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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AN-KOREA

문화예술-산업동향

말레이시아 디자인 아카이브

1월 6일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8월 19일

서론

쿠알라룸푸르 캄풍 앗땁(Kampung Attap)의 창작 거점, 중산 빌딩(Zhongshan Building). 이곳에는 말레이시아인이 자국의 시각 유산을 바라보는 방식을 조용히 바꿔 온 기관이 있다. 2008년 그래픽 디자이너 에즈레나 마르완(Ezrena Marwan)이 세운 말레이시아 디자인 아카이브(Malaysia Design Archive, MDA)다. 출발은 소박했다. 에즈레나와 동료 잭 에스엠 키(Jac sm Kee)가 오래된 포스터와 성냥갑 표지 등 눈길을 끄는 옛 자료를 웹사이트에 소개했다. 작은 비공식 컬렉션은 이제 시각문화를 통해 말레이시아의 정체성에 관한 통념을 되묻는 동남아시아의 주요 독립 아카이브로 성장했다.

MDA의 목적은 자료를 고스란히 보관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에즈레나는 '역사에서 빠져 있던 영역, 즉 말레이시아 디자인사의 부재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시각문화를 들여다보면 한 나라를 빚어 온 사회적·정치적 힘이 보인다는 뜻이다. 여기에 미술사학자 사이먼 순(Simon Soon)이 합류했다. 디자인 전문성과 페미니즘 실천, 학문적 엄밀함을 지닌 세 사람은 말레이시아의 복잡한 시각 유산을 함께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카이브, 문화를 발굴하다

MDA 센터의 금속 선반에는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국가로 나아간 말레이시아의 시간이 빼곡히 꽂혀 있다. 컬렉션은 영국 식민 지배와 일본 점령, 비상사태(the Emergency), 독립의 네 시기로 나뉜다. 자료를 따라가다 보면 시각 디자인이 시대의 이념을 비추는 거울에 그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대중의 생각을 빚는 도구이기도 했다.


에즈레나가 특히 아끼는 1951년 경찰 모집 포스터는 디자인의 두 역할을 한눈에 보여준다. 국가기록원 포스터 구역에서 발견한 이 자료에는 전통 복장을 입은 말레이 남성이 관객을 정면으로 가리키며 공산주의 비상사태기의 경찰 입대를 권하는 모습이 담겼다. 구도는 미국의 엉클 샘(Uncle Sam)과 영국의 키치너 경(Lord Kitchener) 포스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인물의 전통 의상과 독립국가의 상징으로 떠오르던 국기, 자위(Jawi) 문자는 분명 말레이시아의 것이다. 식민 권력과 신생 민족 운동이 같은 시각 문법을 빌리면서도 서로 다른 의미를 입힌 과정, 그리고 독립을 앞둔 사회의 정체성 협상이 한 장에 압축돼 있다.


MDA가 돋보이는 까닭은 과거를 낭만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대의 철도 포스터를 멋스러운 빈티지 이미지로만 소비하지 않고 권력과 재현의 틀 안에서 읽는다. 영국이 말라야 관광을 홍보한 인쇄물에서는 지역 문화를 이국화하는 시선과 경제적 수탈의 논리를 함께 짚어 낸다. 이 비평적 태도는 현재의 자료에도 이어진다. 부패 스캔들을 다룬 작가 크리스 추(Chris Chew)의 정치 밈, 최근 정치적 격변기에 등장한 소셜미디어 그래픽까지 모두 기록의 대상이다.


학제 간 협업이 지역사회로 이어질 때

MDA는 시각적 문해력을 문화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도구로 본다. 여러 문화가 겹겹이 포개진 말레이시아의 시각문화사는 하나의 전공만으로 풀기 어렵다. 그래서 작가와 철학자, 건축가, 역사학자, 도시연구자, 사회학자, 디자이너, 예술가가 한자리에 모인다. 서로 다른 관점으로 말레이시아 사회가 공유해 온 시각 언어를 해독하는 것이다.


협업은 아카이브 밖의 지역사회로도 뻗어 간다. MDA 센터는 자료 보관소인 동시에 공개 강연과 독서 모임, 어린이·청소년 워크숍이 열리는 활동 공간이다. 2019년에는 페낭 미술사 심포지엄 '위대한 신세계: 자유항에서 유산 유적지로(Great New World: From Free Port to Heritage Site)'를 공동 주최했다. 한 지역의 문화 보존이 더 넓은 역내 유산 논의와 만나는 자리였다.


공간의 위치도 MDA의 지향을 보여준다. 1950년대 건물을 고친 중산 빌딩은 쿠알라룸푸르의 옛 도심과 가깝고 대중교통으로 찾기 쉽다. 덕분에 평소 유산 기관과 거리를 두던 젊은 관객도 자연스럽게 모여든다. 예술가와 연구자, 문화 종사자가 함께 활동하는 창작 거점에 자리한 만큼 분야 간 교류도 활발하다. 그 만남은 다시 아카이브의 해석을 풍성하게 만든다.


빠듯한 살림에서 시작한 디지털 전환

상당한 문화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MDA는 제한된 자원 속에서 운영되고 있다. 에즈레나는 MDA를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강사로 일해 번 수입으로 전액 운영한다'고 설명한다. 말레이시아의 많은 독립 문화 기관이 겪는 현실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월 임대료는 1,100링깃(RM1,100) (약 35만원)이다. 적은 비용으로 알뜰하게 운영한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작은 충격에도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다. 활동이 알려지며 가족과 수집가의 기증은 늘었지만, 제한된 자원 탓에 모든 자료를 받을 수는 없다.


MDA는 기술 투자와 협력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최근 전문 스캔 장비를 들이면서 평면 자료는 물론 입체 물품까지 더 정교하게 디지털화할 수 있게 됐다. 자료를 보존하고 공유할 범위도 넓어졌다. 검색형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는 또 하나의 전환점이다. 이제 세계 어디서든 연구자가 그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말레이시아 시각문화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디지털화는 이미지를 복제하는 작업으로 끝나지 않는다. MDA의 온라인 플랫폼은 자료가 만들어진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함께 풀어낸다. 이용자는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보는 대신, 해설을 바탕으로 의미를 스스로 읽어 낸다. 보존과 비평적 교육을 한자리에서 잇는 이 방식이 MDA를 일반적인 아카이브와 구분 짓는다.



지역 문화정책에 던지는 질문

MDA의 활동은 아세안 차원의 문화유산 정책 및 협력의 맥락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일본-아세안 통합기금(Japan-ASEAN Integration Fund)의 지원으로 출범한 아세안 문화유산 디지털 아카이브(ASEAN Cultural Heritage Digital Archive)는 정부 주도로 역내 문화유산을 디지털화하는 사업이다. 이에 비해 MDA는 지역사회가 10년 넘게 축적한 보존 경험을 갖고 있다. MDA가 축적한 경험은 식민 유산과 동시대의 정치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방법론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MDA의 시각문화 분석은 동남아시아 다른 나라에도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이다. 디자인이 국가의 변화를 어떻게 비추고 또 이끌었는지를 함께 살피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시각문화에 담긴 '시기별 사회·정치적 분위기'를 읽는 틀은 이웃 나라가 지나온 비슷한 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시각 자료를 매개로 여러 분야가 협업하는 방식 역시 역내 학술 교류의 가능성을 넓힌다.


정부의 문화 사업이라는 관점에서 MDA는 기회와 과제를 동시에 보여준다. 적은 자원으로 대중의 참여와 학계의 관심을 끌어낸 성과는 독립 문화 기관을 지원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중요한 문화 보존 작업을 한 개인의 헌신과 자원봉사에만 맡기면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분명히 드러낸다.


오늘을 모아 내일의 역사를 만들다

MDA는 최근 동시대의 정치 자료로 시선을 넓히고 있다. 일반 시민이 격동의 시기에 접하고 만든 시각 자료를 함께 모으는 '2020년(Year 2020)' 컬렉션이 대표적이다. 과거의 유산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 형성되는 문화를 훗날의 역사 자료로 남기려는 시도다. 살아 있는 경험의 복잡성을 놓치지 않으려면 오늘의 자료를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연구 조직도 연대순보다 주제를 중심으로 꾸린다. 시각 자료에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 계급에 관한 어떤 전제가 숨어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다. 이 접근은 디자인을 완성된 결과물로만 보지 않는다. 오늘의 말레이시아에서 사회 관계와 정치적 가능성을 계속 빚어 내는 힘으로 읽는다.


MDA의 영향력은 국경 밖으로 이어진다. 팀이 국제 학술대회와 전시,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말레이시아 시각문화 연구도 탈식민 정체성과 문화 보존, 재현의 정치를 둘러싼 세계의 논의에 합류했다. 이 같은 지적 활동은 말레이시아의 소프트파워를 넓히는 동시에, 자국 문화를 스스로 비평할 역량이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

MDA는 지역사회가 주도한 문화 보존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에즈레나 마르완과 잭 에스엠 키, 사이먼 순은 엄밀한 방법론과 비평적 분석, 대중 참여를 바탕으로 말레이시아의 시각 유산을 지켜 왔다. 동시에 시민이 자국의 문화사를 이해하는 방식도 새롭게 짰다. 문화 보존에는 기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시각문화에 스민 정치성을 드러내고,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열린 대화를 이끌어 내는 해석이 뒤따라야 한다.


적은 자원으로 큰 문화적 파급력을 만든 MDA의 성과는 정책에도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독립성을 해치지 않는 지원이 뒷받침된다면 이런 기관은 말레이시아의 문화 역량을 더 크게 키울 수 있다. 말레이시아가 ASEAN과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다져 가는 지금, 역사적 유산과 동시대의 가능성을 함께 읽는 MDA의 분석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MDA의 이야기가 끝내 가리키는 곳은 국가 문화 기반의 빈틈이다. 헌신적인 개인은 그 틈을 메우고, 건강한 민주사회에 필요한 비판적 참여까지 키워 낼 수 있다. 모든 디자인에는 두 개의 삶이 있다. 하나는 처음 맡았던 쓰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공유하는 시각 세계를 빚어 온 힘을 오래도록 비추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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