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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AN-KOREA

문화예술-산업동향

제주의 한-아세안 올레길: 걸으며 경험하는 문화외교

6월 15일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8월 21일

문화 외교가 회의실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다 문득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나라의 이야기를 읽게 되는 순간에도 문화 외교는 일어난다. 한-아세안 올레길(ASEAN-Korea Olle Trail)은 바로 그런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길이다.



제주 서귀포 제주올레 8코스 지도: 해안 길과 코스의 주요 지점
제주 서귀포 제주올레 8코스 지도: 해안 길과 코스의 주요 지점

색다른 올레

제주 말로 '올레(olle)'는 집과 큰길을 잇는 좁은 골목, 곧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연결하는 정겨운 통로를 뜻한다. 2007년 이래 제주올레 트레일 네트워크는 이 소박한 낱말을 437km 길이의 해안·내륙 도보 코스망으로 키워 냈다. 전직 기자 서명숙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얻어, 걷는 이들을 섬의 화산 지형과 어촌 마을에 다시 이어 주고자 이 길을 새롭게 구상했다.

제주 남쪽 해안을 따라 19.6km 이어지는 8코스는 한-아세안 대화관계 수립 35주년을 맞아 2024년 11월 한-아세안 올레(ASEAN-Korea Olle)로 지정됐다. 2025년 11월에는 아세안(ASEAN) 회원국을 하나씩 상징하는 기념 벤치 열 개가 더해지면서 길의 성격도 한층 풍성해졌다.


열 개의 벤치, 열 개의 문화

벤치는 코스를 따라 브루나이 다루살람,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순으로 알파벳순으로 놓였다. 초고성능 콘크리트(UHPC)로 만들어 제주의 거센 해풍과 소금기 어린 공기를 견디도록 설계했다. 벤치마다 이 길의 상징인 말 모양 표지 '간세(ganse)'가 짝을 이룬다. 간세에는 선별된 문화 콘텐츠로 연결되는 QR 코드가 있으며, '올레 패스포트' 스탬프를 모으는 지점이자 잠시 멈춰 쉬라는 조용한 신호 역할도 한다.


벤치가 놓인 자리에는 저마다 뜻이 있다. 말레이시아 벤치에서는 중문색달해변이 그리는 너른 곡선이 내려다보이고, 미얀마 벤치는 옛 해안 성벽인 환해장성 옆에 자리한다. 이런 배치는 방문객이 한 나라의 이야기를 다른 나라의 풍경을 배경 삼아 읽도록 이끌어, 설명 위주의 전시로는 좀처럼 만들어 내기 어려운 자연스러운 문화 간 만남을 빚어낸다. 2025년 준공식에서 김재신 한-아세안센터(AKC) 사무총장은 "올레가 집과 길을 잇듯, 이 길은 한국과 ASEAN을 잇습니다. 먼 이웃을 가까운 벗으로 바꾸며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길입니다"라며 이 길의 의미를 짚었다.


소프트 인프라, 그리고 실제 관객

한-아세안 올레가 정책 수단으로서 눈길을 끄는 까닭은 실제 관객과 맞닿아 있다는 데 있다. 제주올레는 이미 적잖은 동남아시아 방문객을 불러 모으며, 특히 장거리 구간을 완주하려고 일부러 찾아오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베트남의 '슬로 트래블러'가 눈에 띈다.

제주올레재단 안은주 대표이사는 이 길이 이미 걷고 있던 사람들을 만난다는 점을 강조했다. 콘텐츠를 먼저 만들고 관객을 찾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여정 속에 문화적 표상을 담아, 통상적인 문화 기획의 순서를 뒤집은 것이다. 이렇게 이뤄지는 만남은 우연히 찾아오고 몸으로 경험하며 천천히 쌓여, 디지털 캠페인보다 더 쉽게 이해된다.


2022년 제주국제평화센터에 문을 연 제주 아세안홀. ASEAN과 제주 문화를 함께 체험하며 ASEAN 각국 국민과 한국 국민의 상호 이해와 인적 교류를 넓히는 공간으로, ASEAN 회원국과 제주 지역의 공예품과 유물을 조화롭게 전시.

넓어지는 네트워크

한-아세안 올레길은 제주국제평화센터에 자리한 제주 아세안홀과 짝을 이룬다. 이곳의 'ASEAN 문화·관광 북 코너'에는 ASEAN 대사들이 직접 고르고 서명한 책이 놓여 있다. 길과 전시관은 한 건물 안이 아니라 여러 장소에 걸쳐 펼쳐지는 '분산형 문화 캠퍼스'를 함께 이룬다. 가장 최근 ASEAN 회원국이 된 동티모르의 벤치는 이 나라가 한-아세안센터에 정식 가입한 뒤 설치할 예정이다.


눈여겨볼 만한 모델

문화 외교는 흔히 콘서트의 규모나 방송의 도달 범위 등 행사 규모로 평가된다. 그러나 한-아세안 올레길은 만남의 지속성이라는 다른 척도를 제시한다. 결국 이 길은 바닷가에 놓인 벤치 하나다. 동시에 우리가 먼 이웃을 보도자료가 아니라 걸을 때 비로소 경험하는 특유의 고요함을 통해 이해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료 및 참고


공식 코스 지도: 제주올레 8코스(공식 사이트). 월평에서 대평까지의 정확한 경로를 확인하는 데 쓰면 된다. 

기관 맥락: 한-아세안센터(AKC). 'News' 섹션에서 2025년 11월 벤치 준공식의 공식 보도자료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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