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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AN-KOREA

문화예술-산업동향

인도네시아 바틱(Batik): 유네스코 문화유산에서 세계적 지식재산(IP) 자산으로 (2)

  • 4월 28일
  • 11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1일

4. 디지털 경제 속 바틱: 플랫폼, AI, 그리고 새로운 위험


바틱 산업의 디지털화는 시장 확장을 가속화하는 동시에, 기존 제도적 틀이 대응하지 못하는 새로운 유형의 지식재산(IP) 위험을 야기하고 있다.


기회 측면에서 보면, 국내의 Tokopedia, Shopee, Lazada는 물론 글로벌 브랜드까지 아울러 전자상거래 플랫폼은 기존에 지역 시장이나 관광객 중심으로 판매하던 소규모 바틱 생산자들에게 국제 시장 접근성을 제공다. 또한 소셜미디어는 바틱 문양을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동시에, 해외 디자이너 및 브랜드와의 협업을 촉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24년 Garuda Indonesia와 The Pokémon Company의 협업이 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피카츄가 바틱 셔츠를 입은 모습을 항공기 외장 디자인(livery)에 적용하였다. 인도네시아 창조경제부 차관은 이 협업을 “로컬 IP와 글로벌 IP 간 협력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하며, 바틱이 비전통적 상업 맥락에서도 인지 가능한 문화 브랜드로 기능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 사례는 특히 기존의 취약성 구조를 뒤집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데, 인도네시아의 문화적 자산이 외부에 의해 도용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라이선싱 구조 속에서 동등한 파트너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위험 측면에서는, 디지털 유통 환경이 무단 복제를 더욱 용이하게, 추적은 어렵게 만들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공유된 패턴 파일은 역설계(reverse engineering) 및 변형을 거쳐 제3국의 제조 공정을 통해 산업적 규모로 대량 복제될 수 있다. 전통 바틱 문양을 모방하는 AI 생성 섬유 패턴이 새로운 형태의 지식재산권(IP) 노출 지점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더욱 복잡한 문제이다. 생성형 이미지 도구는 시각적으로는 충분히 바틱과 유사하지만 법적으로는 별개의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양식적 추출(stylistic extraction)’을 명확하게 규율하는 보호 체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는 특정 등록 작품을 직접 복제하지는 않지만, 원본이 지닌 문화적 고유성을 체계적으로 약화시킴으로써 그 가치 기반 자체를 잠식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인도네시아 정부는 2024년 10월 디지털통신부(Komdigi)를 통해 SAMAN 콘텐츠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해당 시스템은 디지털 플랫폼 상 유해 콘텐츠를 규제하고, 2024년 말부터 2025년까지 2단계에 걸쳐 행정적 제재를 시행하는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이 제도는 주로 유해 콘텐츠 규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창작물 IP 침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2019년 제정된 창조경제법(법률 제24/2019)은 지식재산 보호, 연구개발 지원, 시장 확대 등을 포함하여 창조경제 전반을 위한 법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다만 실제 이행은 아직 불규칙적이고 국제화 문제나 AI 관련 쟁점까지 충분히 포괄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은 바틱을 보다 넓은 창조산업 정책의 일부로 자리매김하는 제도적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향후 아세안 차원의 창조산업 협력 플랫폼(ASEAN CoE for Creative Industries)이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할 경우, 이러한 정책 구조는 국경을 초월한 집행 역량을 갖춘 지역적 프레임워크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5. 바틱과 아세안 IP 조화(Harmonization)의 과제


바틱이 지닌 지식재산 취약성은 아세안 창조산업 우수센터(CoE)가 추진하는 IP 조화 과제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CoE가 제시한 핵심 의제—ASEAN Working Group on Intellectual Property Cooperation(AWGIPC)와 협력하여 창작 자산의 가치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담보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지역 표준 구축—은 바틱 사례가 보여주는 구조적 문제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바틱 생산자들이 직면한 문제는 단순 법적 보호 수단의 부족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문화 IP가 직면한 위험의 범위(지역·글로벌)실제 집행 가능한 법적 권한의 범위(국가 단위) 사이의 불일치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복제되어 유럽에서 판매되는 바틱 제품은 인도네시아의 국내 법 집행 범위를 벗어난다. 인도네시아에서 등록된 지리적 표시(GI)는 태국에서는 효력을 갖지 않으며, 자카르타에서 등록된 상표는 수출 대상국마다 별도로 재등록해야 하는데, 이는 대부분의 중소 생산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다.


이러한 공백은 국가 단위를 넘어선 지역 차원의 제도적 대응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 <ASEAN IP Rights Action Plan 2016–2025>은 2021년 기준 약 82%의 과제가 완료 또는 진행 중으로 보고되며, 회원국 간 IP 협력을 위한 제도적·외교적 기반을 마련했다. CoE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창조산업 분야에 특화된 실행력을 부여할 수 있는 기회로, 단순한 협약 수준을 넘어 상호 인정과 실질적 집행 체계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동시에 바틱 사례는 CoE 목표 내부에 존재하는 긴장 관계를 드러낸다. 한편에는 표준화, 시장 접근성, 대규모 상업화를 중시하는 경제 통합의 목표가 있다. 다른 한편에는 지역적 특수성, 공동체의 통제권, 전통지식의 보존을 중시하는 문화적 정체성의 목표가 자리한다.

이 두 목표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필리핀 애니메이터가 금융 조달을 위해 활용하는 IP 가치평가 도구와, 이푸가오(Ifugao) 직조 공동체의 신성한 문양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는 서로 다른 접근을 필요로 한다. CoE는 이 두 축을 동시에 다루어야 하며, 그 균형 방식이 결국 아세안 창조경제의 방향성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6. 지역적 함의


인도네시아 바틱의 사례는 아세안 창조경제 전반에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며, 이는 CoE의 제도 설계뿐 아니라 해당 지역에 대한 한국의 문화 ODA 전략에도 직접적인 시사점을 가진다.


  • 첫째, UNESCO 문화유산 등재는 문화적 정당성과 소프트파워 측면에서 의미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자동적으로 IP 보호나 경제적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실제 경제적 가치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거버넌스 구조, 인증 체계, 국제 IP 출원 역량이 필요하며, 이러한 체계가 구축되기까지는 수십 년의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 둘째, 지리적 표시(GI)가 지역 공동체 기반의 전통 창작물 보호에 가장 적합한 잠재적 수단 중 하나다. 저작권이 개인소유여야 하며 창작성 입증과 국경 간 집행이 어렵다는 한계를 가지는 반면, GI는 특정 지역성과 집단적 생산을 기반으로 하여 개별 저자 입증 없이도 집단적 보호를 가능하게 한다. 인도네시아가 바틱을 포함한 전통 제품에 GI를 확대 적용하는 방식은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 등의 전통 섬유 산업에 적용하기 시작한 하나의 정책적 모델로 작용하고 있다.


  • 셋째, 산업디자인권은 전통과 상업 IP 보호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활용되지 않고 있다. 바틱 문양이 제품에 적용될 경우, 추상적 패턴 자체보다 적용된 시각적 형태를 보호하는 산업디자인법이 오히려 더 강력한 보호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IP 자문 역량이 부족한 소규모 생산자와, 저작권 중심으로 사고하는 정책 환경에서 체계적으로 간과되고 있다.


  • 넷째, 전통 창작 자산의 보호와 상업화를 위해서는 IP 기준, 인증, 집행에 대한 지역 차원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이는 CoE 논의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한데, 바틱은 국경을 넘어 복제되고 유통되며, GI 보호는 국가 단위에서 멈춘다. 따라서 문제의 범위가 글로벌한 산업에서, 국가 단위 해결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7. 아세안 패션 IP: 국가별 사례


인도네시아 바틱에서 드러난 구조적 문제는 특정 국가나 특정 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세안 전역에서 전통 기반 패션 및 섬유 산업은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 문화적 가치와 법적 보호 간의 간극

  • 공동체 전통과 개인 상업화 간의 긴장

  • 수공업 기반 생산 구조와 기계화 대량 복제 간의 취약성


이러한 맥락에서 아래 사례들은 바틱을 넘어 지역 전체로 시야를 확장한다.


7.1 태국: 타이 실크와 짐 톰슨(Jim Thompson) 모델


태국의 실크 산업은 전통 공예에서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의 전환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룬 사례 중 하나다. 특히 짐 톰슨(Jim Thompson) 모델은 장인 기반 생산을 국제 브랜드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IP, 브랜딩,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획득과 상실의 문제를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태국 실크 산업이 오늘날과 같은 국제적 상업 카테고리로 자리 잡는 데에는 Jim Thompson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방콕에 정착한 미국인 건축가로, 1951년 The Thai Silk Company Limited를 설립하였다. 당시 수공 직조 실크는 기계 생산 직물과 합성 섬유의 확산으로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톰슨은 태국 실크가 지닌 미학적 가치와 동시에 국제 시장에서의 잠재력을 간파하였고, 미국의 디자인·패션·엔터테인먼트 네트워크를 활용해 이를 글로벌 무대로 확장했다. 그는 태국 실크를 브로드웨이 공연인 The King and I, 패션 매거진 Vogue, 왕실 순방, 그리고 주요 꾸뛰르 디자이너들의 작업실에까지 진입시키며 문화적·상업적 가치를 동시에 확산시켰다.


Jim Thompson 모델의 지식재산(IP) 전략은 문화유산 기반 보호가 아닌 브랜드 중심 구조에 가까웠다. 즉, 태국 실크를 하나의 집단적 문화 자산으로 보호하려 하기보다, 창립자의 서사와 정체성에 기반한 독점적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방식이었다. 이 브랜드는 창립자의 카리스마, 1967년의 미스터리한 실종 사건, 그리고 전통 태국 문양과 서구 현대 디자인 감각을 결합한 독특한 미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전략은 높은 상업적 성과로 이어졌다. 오늘날 Jim Thompson은 패션, 홈퍼니싱, 호텔·호스피탈리티, 몰입형 문화 경험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으며, 태국 전역에 31개의 리테일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2026년 3월에는 Assouline과의 협업을 통해 75주년을 기념했는데, 이는 브랜드 간 협업을 넘어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서의 포지셔닝을 강화하는 전략적 행보로 평가된다.



2025년 태국에서 촬영된 드라마 The White Lotus(시즌 3) 등장은 Jim Thompson 브랜드에 약 3,500만 달러 규모의 홍보 효과를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브랜드 기반 문화 IP가 엔터테인먼트 IP 인프라를 활용하여 확장되는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일반적인 문화유산 인증 체계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효과다.


그러나 이 모델의 한계 또한 분명하다. Jim Thompson의 브랜드 중심 전략은 태국 실크를 집단적 문화유산으로 보호하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이를 개별 기업의 브랜드 자산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대체(displace)했다. 해당 브랜드에 공급되는 직조 장인과 양잠 농가들은 고용 및 공급망 구조 안에 편입되어 있으며, 이 구조는 Jim Thompson의 상표는 보호하지만 전통 공예 자체는 법적으로 보호하지 못한다.


그 결과, 태국 실크의 문양과 직조 기술은 다른 국가의 제조업체에 의해 복제·생산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법적 제재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Thai silk(태국 실크)”라는 범주가 Champagne이나 Roquefort처럼 국제적으로 강력한 지리적 표시(GI) 또는 인증마크로 보호되지 않기 때문이다. 태국은 비교적 성공적인 GI 제도를 운영하며 지역 내 모범 사례로 평가되지만, 실크 분야에서는 Jim Thompson이 구축한 상표 기반 글로벌 시장 침투력을 대체할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아세안 창조산업 우수센터(CoE)가 반드시 다뤄야 할 핵심적 긴장을 드러낸다.


  • 브랜드 기반 IP 전략은 개별 기업에는 효과적이지만, 공동의 문화유산을 보호하지 못하고,

  • 공동체 기반 GI 전략은 집단 자산을 보호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생산자 조직, 인증 체계, 정부 지원, 국제 등록 등 복합적인 제도 인프라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전통 섬유 공동체는 이러한 인프라를 독자적으로 구축할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다.



7.2 베트남: 아오자이와 문화 저작권의 한계


베트남의 전통 의상인 아오자이(áo dài)는 또 다른 유형의 IP 사례를 보여준다. 아오자이는 베트남 국가 정체성과 깊이 결합된 대표적 문화 자산이지만, 공식적인 IP 제도로는 거의 보호가 불가능한 영역에 속한다는 점에서 더욱 상징적이다.

아오자이는 수세기에 걸쳐 디자인 변화와 발전을 거쳐왔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은 1930년대 초, 예술가 Nguyễn Cát Tường이 기존 형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사건이다. 그는 1934년 신문 Phong Hóa에 발표한 ‘르뮈르(Lemur)’ 스타일을 통해 몸에 밀착되는 실루엣, 연잎 형태의 칼라, 퍼프 소매 등을 도입하며 아오자이를 현대적 패션으로 재탄생시켰다.


그러나 Nguyễn Cát Tường이 34세의 나이로 사망한 이후, 그의 가족은 해당 디자인에 대한 지식재산권을 등록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오자이는 특정 창작물로서의 저작권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법적으로는 퍼블릭 도메인(공공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이는 누구나 자유롭게 재생산, 변형, 상업화, 심지어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처럼 공식적인 지식재산 보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아오자이는 문화외교의 중요한 매개로 기능해왔다. ‘아오자이의 홍보대사’로 불리는 디자이너 Minh Hạnh은 전통 소재와 소수민족 문양을 현대적 디자인과 결합하여 아오자이를 국제 패션 무대에 소개해왔다. 이 접근은 아오자이를 법적으로 보호된 카테고리로 보기보다, 법적 권리보다 미학적 권위를 통해 스스로 정당성을 확보하는 ‘살아있는 창작 전통’으로 위치시키는 전략이다.


또한 Ho Chi Minh City Áo Dài Festival, Vietnam Áo Dài Week과 같은 연례 행사는 아오자이를 하나의 문화적 범주로서 국제적으로 가시화하는 소프트파워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한편, 베트남의 지식재산법은 전통문화표현(TCE)에 대한 보호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법 제14조에서는 민속 예술 작품을 저작권 보호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전통문화에서 파생된 2차 창작물 역시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보호된다. 그러나 아오자이의 실루엣과 의복 형태 자체는 여전히 퍼블릭 도메인에 가까운 상태로 남아 있다. 이로 인해 글로벌 패션 브랜드들은 아오자이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을 별도의 출처 표기나 비용 지급 없이 자유롭게 생산·판매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법적 제재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2022년 개정된 베트남 IP법은 EU-Vietnam Free Trade Agreement 및 CPTPP* 이행 의무의 영향 아래 보호 범위를 확대하고, 음향상표(sound mark) 등록을 처음으로 허용하는 등 제도적 현대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전통 의복 형태 자체의 보호라는 핵심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이에 대해 베트남 디자이너들과 문화계는 아오자이를 국제 IP 기구에 등록할 것을 요구하며, 글로벌 문화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자국 문화 상징 보호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아오자이 사례는 아세안 전반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공백을 보여준다. 문화적 의미를 지니지만 기존 IP 체계에 명확히 포섭되지 않는 전통 의복에 대해 특화된 법적 보호 수단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 저작권은 창작자와 독창성을 요구하고,

  • 상표권은 상업적 사용을 전제로 하며,

  • 지리적 표시는 생산 지역의 특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전통 의복은 이 세 가지 범주 어디에도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다.


2022년 한 학술 연구에 따르면, 아세안 지역에서 전통 의복 보호는 구조적으로 취약한 상태이며, 이를 규율하는 별도의 지역 차원 법적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문화표현(TCE)에 대한 보호는 국제 IP 체계에서 원칙적으로 인정되지만, 대부분의 회원국에서 국내 법제 차원의 실질적 이행은 매우 제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Agreement for Trans-Pacific Partnership)


7.3 필리핀: 토착 직조 문화와 미비한 법적 보호 체계


필리핀은 아세안 패션 IP 문제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례를 보여준다. 110개 이상의 민족·언어 공동체가 각기 다른 직조 전통, 문양 체계, 문화적 규범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산을 상업적 전유로부터 보호할 실질적 법적 체계는 거의 부재한 상황이다.


필리핀의 토착 직물(마긴다나온(Maguindanaon)의 inaul, 트볼리(T’boli)의 t’nalak, 아클란(Aklan)의 piña, 마티그살룩 마노보(Matigsalug Manobo)의 hinabol 등) 은 이미 수십 년간 현대 패션에 통합되어 왔다. 전통직물은 하이패션, 포멀웨어, 외교 의전 복식 등에 활용되며 높은 문화적 가시성을 확보했으나 이는 직조 공동체의 보호나 공정한 경제적 참여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전통 직조 문양이 가지는 공동체적·신성한·맥락 의존적 성격과, 기존 IP 제도가 전제하는 개인 중심·세속적시장 일반화된 논리 사이의 구조적 불일치다. 특정 문양은 종교 의례, 사회적 위계, 세대 간 전승 체계 속에 내재되어 있어 공동체 전체에 귀속되며, 개인이 이를 소유하거나 등록할 수 없다. 집단상표나 지리적 표시(GI)는 부분적 대안이 될 수 있으나, 이를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생산자 조직, 법적 역량, 정부 지원 등의 제도적 인프라는 많은 토착 공동체가 갖추지 못한 상태다.


이와 관련해 이푸가오 문화유산학교 설립자 Marlon Martin은, 법적 개입이 없다면 패션 브랜드가 창작물로 주장한 문양이 결국 해당 브랜드의 것으로 인식되고, 원 공동체는 배제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문제는 2020년 문화 전유 논쟁을 통해 대중적으로도 주목받았다. 한 유명 디자이너가 트볼리 공동체의 대표적 직조 장인이자 ‘국가 살아있는 보물(National Living Treasure)’인 Lang Dulay의 이미지를 동의나 출처 표기 없이 패션 작품에 사용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논의를 촉발했지만, 필리핀 법체계에서 문화 전유는 명확한 위법 행위로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법적 제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정부 차원의 제도적 대응도 아직 미흡하다. 필리핀은 2021년 ASEAN Working Group on Intellectual Property Cooperation(AWGIPC) 의장국을 맡으며 IP 정책에 대한 관심을 확대했지만, 토착 섬유 보호를 위한 구체적 제도는 여전히 부재하다.


한편, 보다 실천적인 대안은 사회적 기업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Balik Batik의 창립자 Veronica Baguio는 토착 공동체와의 직접적·합의 기반 협력을 통해 사업을 운영하며, 문양 소유권을 인정하고 문화적 규범을 존중하는 방식을 실천하고 있다. 또한 HABI: The Philippine Textile Council과 같은 기관은 공동체 기반 생산과 시장 접근을 결합한 모델을 구축하고 있으며, 매년 개최되는 Likhang HABI Market Fair를 통해 직조 공동체를 직접 시장과 연결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사례들은 의미 있는 모델이지만, 산업 전반을 보호하기에는 여전히 제도적 기반이 부족한 상태다.


2024년 12월 바기오에서 개최된 World Ikat Textile Symposium는 아세안 및 글로벌 직물 전문가들이 모여 문화 전유, 공동체 소유권, 색상 및 문양 변형의 윤리 문제를 논의한 자리였다. 이는 지역 내 지식 교류 수준이 상당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를 실제로 집행할 법적 프레임워크의 부재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필리핀이 2026년 아세안 의장국을 맡게 된 것은 중요한 정책적 기회를 제공한다. CoE 체계 하에서 AWGIPC를 주도하는 필리핀은 개별 국가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지역 차원의 IP 표준과 집단적 보호 메커니즘을 설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특히 토착 직물 문제는 이러한 논의의 핵심에 해당한다. 만약 CoE의 IP 조화 작업이 전통문화표현(TCE)을 포함하지 못한다면, 이는 창조산업 보호라는 목표의 절반만 달성하는 결과에 그칠 것이다.



7.4 지역적 패턴: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


인도네시아의 바틱, 태국의 실크, 베트남의 아오자이, 필리핀의 토착 직물 사례를 종합하면, 아세안 전반에 걸쳐 일관된 구조적 패턴이 드러난다.


깊은 문화적 유산과 높은 국제적 상업적 잠재력을 지닌 자산들이, 실제로는 그 목적에 맞지 않는 지식재산(IP) 제도에 의해 제한적으로만 보호되고 있다는 점이다.

  • 저작권은 개인 창작자를 전제로 설계되었고,

  • 상표권은 상업적 브랜드 식별을 위해 존재하며,

  • 특허는 기술 혁신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다.


이 제도들은 공동체가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특정 지역에 뿌리를 둔 전통 창작 표현이라는 특수한 법적 존재(legal ontology)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이 문제에 가장 근접한 제도는 지리적 표시(GI)이지만, 그 역시 한계를 지닌다. 아세안 지역은 점차 GI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확대하고 있으나,

  • 등록 절차가 느리고 비용이 높으며,

  • 생산자 조직과 인증 체계 등 강한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고,

  • 무엇보다도 등록된 국가 내에서만 효력을 가진다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태국에서 등록된 실크 GI는 유럽 시장에서 캄보디아나 베트남 생산자가 유사 제품을 “태국 스타일 실크”로 판매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따라서 아세안 창조산업 우수센터(CoE)의 IP 조화(harmonization) 과제는 단순한 기술적 논의가 아니다. 이는 이미 존재하는 구체적인 시장 실패에 대한 대응이다. 현재 구조는 장인 공동체, 전통 생산자, 국가 창조경제에 매년 반복적으로 경제적 손실과 문화적 권위의 약화를 초래하고 있으며, 이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법적 수단이 부재하다. 바틱, 실크, 직조 사례는 서로 다른 산업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문제의 국가별 변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지역 차원의 해결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최소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필요하다:

  • 회원국 간 GI 등록 상호 인정 체계 구축

  • 검증된 전통·유산 기반 창작물에 대한 아세안 공동 인증마크 도입

  • 토착 및 장인 공동체가 IP 등록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적·제도적 지원

  • 기존의 선언적 수준을 넘어, 실제 집행 가능한 권리로 확장된 전통문화표현(TCE) 보호 프레임워크 구축


이와 관련하여 2025년 5월 채택된 ASEAN Creative Economy Sustainability Framework는 13대 전략 과제 중 하나로 “지식재산에 대한 공동 접근(common approach)”을 명시하고 있다. CoE는 이러한 전략을 실제로 실행 가능한 제도로 전환할 핵심적인 제도적 플랫폼이다.

[8] US Trade Representative (USTR). "2025 Special 301 Report on Intellectual Property Protection and Enforcement." April 2025. https://ustr.gov/about/policy-offices/press-office/press-releases/2025/april/ustr-releases-2025-special-301-report-intellectual-property-protection-and-enforcement

[9] TravelText. "Garuda–Batik Pikachu Livery: A Collaboration Between Global & Local IP." November 2024. https://traveltext.id/2024/11/10/garuda-batik-pikachu-livery-a-collaborations-between-global-local-ip/

[10] National Bureau of Asian Research (NBR). "Intellectual Property Challenges in the ASEAN Region." 2021. https://www.nbr.org/publication/intellectual-property-challenges-in-the-asean-region/

[11] Harding et al. "Geographical Indication in Indonesia: A Review on the Spatial Distribution and Classification of Geographical Indication–Registered Products." Journal of World Intellectual Property, November 2024. https://onlinelibrary.wiley.com/doi/full/10.1111/jwip.12332

[12] Jim Thompson Fabrics. "About Jim Thompson." https://www.jimthompsonfabrics.com/our-story/about-us

[13] Travelindex / Visit Thailand. "Jim Thompson Celebrates 75 Years: Weaving Heritage into a Global Lifestyle Legacy." March 6, 2026. https://www.visitthailand.net/experiences-in-thailand/jim-thompson/jim-thompson-celebrates-75-years-weaving-heritage-into-a-global-lifestyle-legacy/

[14] Travel and Tour World. "Thailand Tourism Gets a Boost as Jim Thompson Showcases Silk Heritage and Cultural Innovation." September 2025. https://www.travelandtourworld.com/news/article/thailand-tourism-gets-a-boost-as-jim-thompson-showcases-silk-heritage-and-cultural-innovation/

[15] Vietnam.vn. "Áo Dài — Vietnam's Cultural 'Passport'." March 2026. https://www.vietnam.vn/en/ao-dai-tam-ho-chieu-van-hoa-viet

[16] Cultural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Initiative. "Traditional Cultural Expressions of the World: Vietnam." 2020. https://www.culturalintellectualproperty.com/post/what-are-the-laws-for-cultural-fashion

[17] Substantive Justice International Journal of Law. "The Legal Protection Towards Traditional Clothes: Intellectual Property Regimes in ASEAN." 2022. https://doi.org/10.56087/substantivejustice.v5i1.165

[18] HABI: The Philippine Textile Council. "Here's Why You Should Be Mindful of the Indigenous Fabrics You Wear." https://www.habiphilippinetextilecouncil.com/blogs/habi-highlights/here-s-why-you-should-be-mindful-of-the-indigenous-fabrics-you-wear

[20] Intellectual Property Office of the Philippines. "PH Assumes Chairmanship of ASEAN Intellectual Property Cooperation Group." March 2021. Via NBR: https://www.nbr.org/publication/intellectual-property-challenges-in-the-asean-region/

[21] HABI: The Philippine Textile Council. Likhang HABI Market Fair. https://www.habiphilippinetextilecouncil.com/blogs/habi-highlights

[22] HABI: The Philippine Textile Council. "The 7th World Ikat Textile Symposium Themed 'Ties That Bind — Weaving a Defining Future.'" January 2025. https://www.habiphilippinetextilecouncil.com/blogs/habi-highlights/the-7th-world-ikat-textile-symposium-themed-ties-that-bind-weaving-a-defining-future

[23] ASEAN Secretariat. "ASEAN Creative Economy Sustainability Framework." Adopted at the 46th ASEAN Summit, Kuala Lumpur, Malaysia, May 26, 2025. https://asean.org/asean-creative-economy-sustainability-frame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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