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바틱 경제 해부: 글로벌 지식재산(IP) 자산으로 가는 길(2)
최종 수정일: 8월 21일
4. 디지털 경제 속 바틱: 이커머스의 날개와 AI라는 신종 위협
바틱 상거래의 디지털화는 산업의 시장 범위를 확대하는 동시에, 기존의 거버넌스 체계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새로운 유형의 지식재산권(IP) 위험도 만들어내고 있다.
2024년 가루다 인도네시아(Garuda Indonesia)와 포켓몬 컴퍼니(The Pokémon Company)가 협업해 피카츄가 바틱 셔츠를 입은 모습이 담긴 테마 항공기 외관을 선보인 사례는 창의적 IP 협력의 대표적인 사례다. 인도네시아 창의경제부 차관은 이 협업이 현지 IP가 글로벌 IP와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바틱이 전통적인 상업 영역을 넘어 인지도가 높은 문화적 브랜드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 사례가 주목되는 이유는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문화적 자산의 취약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인도네시아의 IP가 일방적으로 전용된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문화적 자산이 글로벌 라이선싱 협력에서 동등한 파트너로 활용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⁹]
디지털 유통의 확대는 새로운 위험도 낳았다. 패턴 파일은 쉽게 역설계돼 제3국에서 대량 복제될 수 있다. 생성형 AI 도구는 전통 바틱 문양을 시각적으로 모방한 '유사 바틱'을 만들어 내지만, 원본 저작권을 직접 침해하지 않고 양식만 추출하는 행위를 제재할 법적 장치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바틱이 활발히 유통되는 디지털 환경에서 정작 바틱의 문화적 가치와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인도네시아 통신디지털부(Komdigi)는 2024년 10월 SAMAN 콘텐츠 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디지털 플랫폼의 금지 콘텐츠를 대상으로 하며, 2024년 말부터 2025년까지 2단계에 걸쳐 행정 제재를 시행한다. 디지털 콘텐츠 거버넌스에는 의미 있는 진전이지만 집행 대상은 창의 IP 침해가 아니라 유해 콘텐츠다. 현재 추진 중인 디지털 저작권 개정은 바틱이 가장 활발하게 거래되는 디지털 환경에서 AI 생성 패턴 모방이라는 구체적 과제를 다뤄야 한다.[⁷]
인도네시아의 2019년 창의경제법(제24호/2019)은 IP 보호와 연구개발 지원, 시장 개발 조항을 포함해 창의경제 부문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행은 고르지 않고 해외 시장의 보호 공백이나 AI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도 못한다. 다만 바틱을 더 넓은 창의산업 의제 안에 놓는 정책 구조를 세웠다는 의미가 있다. ASEAN 창의산업 진흥센터(CoE)가 제 역할을 한다면 이 틀을 실제 국경 간 집행력을 갖춘 역내 체계로 확장할 수 있다.
5. 바틱과 ASEAN IP 조화의 과제
바틱의 IP 취약성을 짚어보면, 아세안 창의산업 진흥센터(CoE)가 짊어진 ‘IP 조화(Harmonization)’라는 과제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CoE가 제시한 주요 의제 중 하나는 아세안 지식재산권 협력 실무그룹(ASEAN Working Group on Intellectual Property Cooperation, AWGIPC)과 협력해 창의산업 기업이 무형자산을 담보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역내 IP 가치평가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는 바틱이 보여주는 구조적 문제에 직접 대응하는 접근이다.
바틱 생산자들이 처한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법적 보호 수단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문화 IP 위험이 발생하는 지리적 범위는 역내와 글로벌 수준인 반면, 현재 이용할 수 있는 구제 수단의 관할 범위는 국가 단위에 머물러 있다는 데 있다. 중국에서 복제된 바틱 패턴이 유럽에서 판매될 경우 인도네시아 국내법에 따른 집행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렵다. 인도네시아에서 등록한 지리적 표시(GI)는 태국에서는 보호를 제공하지 않는다. 자카르타에서 등록한 상표 역시 각 수출 시장에서 별도로 재등록해야 하며, 이는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을 수반한다.
이 공백은 역내 차원의 제도적 대응으로만 메울 수 있는데, 다행히 그 토대는 이미 마련돼 있다. 'ASEAN 지식재산권 행동계획 2016–2025(ASEAN IP Rights Action Plan 2016–2025)'가 회원국 간 IP 협력의 절차적·외교적 기반을 마련해 놓았고, 2021년 기준 성과물의 82%가 완료됐거나 진행 중이라고 보고됐다. CoE는 이 협력을 창의산업에 맞춰 실제로 가동해 볼 기회다. 틀을 실제 기능으로, 양해각서를 상호인정으로 바꾸는 단계인 셈이다.[¹⁰]
바틱 사례는 CoE의 임무 안에 존재하는 긴장도 드러낸다. 경제 통합은 표준화와 시장 접근, 대규모 상업화를 요구하지만 문화적 온전성은 고유성과 공동체 통제, 전통 지식 보존을 중시한다. 두 목표는 같지 않다. 필리핀 애니메이터가 자금을 조달하도록 돕는 IP 가치평가 도구와 이푸가오(Ifugao) 직조 공동체의 신성한 문양을 상업적 도용에서 지키는 장치는 서로 다르다. CoE는 두 목표를 함께 다뤄야 하며, 이 긴장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ASEAN이 구축할 창의경제의 성격을 결정할 것이다.
6. 역내에 주는 함의
인도네시아의 바틱 경험은 ASEAN 창의경제 전반에 여러 교훈을 준다. CoE의 제도 설계는 물론 이 지역에서 한국이 추진하는 문화 ODA에도 직접 관련된다.
첫째, UNESCO 유산 지정은 문화적 정당성과 소프트파워에 도움이 되지만 생산자의 IP 보호나 경제적 이익으로 자동 연결되지는 않는다. 문화적 인정을 경제적 가치로 바꾸려면 거버넌스와 인증 제도, 국제 IP 출원 역량을 함께 갖춰야 한다. 지정 뒤 실제 보호 체계가 작동하기까지의 시차는 몇 년이 아니라 수십 년에 이를 수 있다.
둘째, 지리적 표시는 여러 지역이나 공동체가 함께 생산하는 유산 상품에 특히 적합하다. 저작권은 개인이 보유하고 독창성을 입증해야 하며 국경 밖에서는 집행하기 어렵다. 반면 GI는 개별 저작자를 가리지 않고 원산지를 기준으로 집단 보호를 제공한다. 바틱과 다른 전통 상품을 아우르는 인도네시아의 GI 포트폴리오는 베트남과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이 자국 유산 직물 부문에 적용하기 시작한 참고 모델이다.[¹¹]
셋째, 산업디자인권은 전통과 상업 IP 보호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활용되지 않고 있다. 바틱 문양이 제품에 적용될 경우, 추상적 패턴 자체보다 적용된 시각적 형태를 보호하는 산업디자인법이 오히려 더 강력한 보호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IP 자문 역량이 부족한 소규모 생산자와, 저작권 중심으로 사고하는 정책 환경에서 체계적으로 간과되고 있다.
넷째, 전통 창의 자산의 보호와 상업화에는 국가 정책 개혁만으로 부족하다. IP 표준과 인증 상호인정, 집행을 위한 역내 협력이 필요하다. 바틱 패턴은 국경을 넘어 복제되지만 GI의 효력은 국가 관할에서 멈춘다. 시장과 모방자가 세계 곳곳에 흩어진 산업에는 국경 안에서 끝나는 해법만으로 대응할 수 없다.
7. ASEAN 패션 IP: 국가별 사례
인도네시아 바틱에서 드러난 구조적 문제는 인도네시아에만, 또는 바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아세안 전역에서 문화유산과 창의적 자산을 기반으로 하는 패션·섬유 산업은 유사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문화적 중요성과 법적 보호 사이의 간극, 공동의 전통과 개별적인 상업화 사이의 긴장, 그리고 수작업 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이 기계적 방식의 대량 모방에 취약하다는 문제가 대표적이다. 다음 사례들은 바틱을 통해 살펴본 이러한 문제를 아세안 역내 다른 국가와 산업으로 확장해 살펴본다.
태국: 태국 실크와 짐 톰슨 모델
태국 실크(Thai silk) 산업은 장인의 전통 공예를 세계적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전환한 ASEAN의 대표 사례다. 그 전환 과정을 살펴보면 IP와 브랜딩의 교훈뿐 아니라,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현대 태국 실크를 국제적 상품으로 키운 인물은 미국인 건축가 짐 톰슨(Jim Thompson)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방콕에 정착한 톰슨은 1951년 타이 실크 컴퍼니(The Thai Silk Company Limited)를 세웠다. 당시 손으로 짠 실크 공예는 기계 직물과 합성 실에 밀려 빠르게 쇠퇴하고 있었다. 톰슨은 태국 실크의 미학적 가치와 국제 시장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미국 디자인·패션·엔터테인먼트계의 인맥을 활용했다. 태국 실크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왕과 나」(1951)에 등장했고 「보그(Vogue)」와 왕실 순방, 유명 쿠튀리에(couturier)의 작업실에도 진출했다.[¹²]
짐 톰슨 전략의 중심에는 문화유산이 아니라 브랜드가 있었다. 태국 실크 전체를 집단 보호하는 대신, 창업자의 카리스마와 1967년의 미스터리한 실종, 전통 태국 문양과 서구 현대 디자인을 결합한 미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스토리 브랜드'를 만들었다. 전략은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오늘날 ‘짐 톰슨’은 패션과 홈퍼니싱, 호스피탈리티, 문화 체험을 아우르며 태국 전역에 31개 매장을 운영한다. 2026년 3월에는 아술린(Assouline)과의 협업으로 창립 75주년을 기념하며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서의 위치를 드러냈다.[¹³]
2025년 태국에서 촬영한 「화이트 로터스(The White Lotus)」 시즌 3에 등장한 뒤로는 홍보 효과가 더 커졌다. '짐 톰슨' 브랜드가 이 노출로 얻은 홍보 효과는 약 3,500만 달러로 추정된다. 브랜드에 기반한 문화 IP가 엔터테인먼트 IP의 힘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끌어다 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인데, 일반적인 유산 인증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성과다.[¹⁴]
그런데 짐 톰슨의 브랜드 전략은 집단 유산으로서의 태국 실크라는 근본 문제를 풀어낸 게 아니라, 그저 비켜 간 것에 가깝다. 실크를 공급하는 직조공과 양잠 농가는 짐 톰슨의 상표를 지키는 고용·조달 체계 안에 편입됐지만, 정작 그 바탕이 되는 전통 공예 자체는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태국 실크'라는 범주 자체가 '샴페인(Champagne)'이나 '로크포르(Roquefort)'처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지리적 표시나 인증표장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탓에, 태국 실크 패턴과 직조 기법은 다른 나라 제조사가 아무 법적 책임 없이 그대로 재현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태국에도 역내 모범으로 꼽히는 GI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실크에 적용한 성과는 '짐 톰슨' 브랜드가 상표 전략으로 이룬 국제 시장 성과에는 미치지 못한다.[⁴]
이는 ASEAN CoE가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근본적인 과제다. 브랜드 기반의 IP 전략은 개별 기업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지만, 공동으로 보유한 문화유산 자산까지 보호하지는 못한다. 반면 공동체 기반의 지리적 표시(GI) 전략은 공동의 유산 자산을 보호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생산자 협회, 인증기관, 정부의 지원, 국제 등록 등 제도적 인프라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통 섬유 공동체는 이러한 기반을 독자적으로 구축할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다.
베트남: 아오자이와 문화 저작권의 한계
베트남을 대표하는 문화 복식으로 자리 잡은 실크 튜닉 아오자이(áo dài)는 또 다른 의미에서 더욱 뚜렷한 IP 문제를 보여준다. 국가 정체성에 깊이 자리한 문화 자산이어서 보호를 주로 문화 주권의 문제로 인식하지만, 정작 현행 IP 제도에서는 활용할 수 있는 법적 구제 수단이 거의 없다.
아오자이는 수백 년에 걸쳐 크게 변화했다. 결정적인 전환은 1930년대 초 예술가 응우옌 깟뜨엉(Nguyễn Cát Tường)이 실루엣을 현대화하면서 찾아왔다. 그는 몸에 붙는 선과 연잎 깃, 부푼 소매를 결합한 '르뮈르(Lemur)' 디자인을 1934년 신문 「퐁호아(Phong Hóa)」에 발표했다. 문화적 뿌리를 지키면서 아오자이를 현대 패션으로 바꾼 디자인이었다. 응우옌 깟뜨엉이 34세에 숨진 뒤 자녀들은 르뮈르 디자인의 지식재산권을 등록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형태로서의 아오자이에는 명확한 저작권이 없으며, 법적으로 누구나 재현하고 각색하고 상업화할 수 있는 공유 영역(public domain)에 놓였다.[¹⁵]
공식 IP 보호가 없는데도 아오자이는 문화 외교의 매개로 자리 잡았다. '아오자이의 대사'로 불리는 디자이너 민 하인(Minh Hạnh)은 민족 문양과 전통 소재를 현대 디자인과 결합해 이 옷을 국제 런웨이에 올렸다. 법적 권리가 아니라 미학적 완성도로 존재를 증명한 셈이다. 호치민시 아오자이 페스티벌과 베트남 아오자이 위크 같은 연례 행사도 소프트파워 수단으로 기능하며, 이 옷을 국제 사회에 꾸준히 알리고 있다.[¹⁵]
베트남 IP 법에는 전통문화표현(TCE)에 관한 조항이 있다. IP 법 제14조는 민속예술 작품을 저작권 보호 대상에 포함하고, 민속 문화 표현에서 영감을 얻은 2차적 저작물도 원래 전통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보호한다. 그러나 실루엣과 디자인 범주로서의 아오자이는 사실상 공공 영역에 속한다. 이 때문에 해외 패션 브랜드가 아오자이에서 영감을 얻은 의류를 만들어도 베트남이나 베트남 디자이너에게 출처를 밝히거나 대가를 지급할 법적 의무가 없다.[¹⁶]
베트남은 2022년 IP 법을 개정해 보호 범위를 넓히고, 처음으로 소리표장 등록도 허용했다. 2019년 비준한 EU-베트남 자유무역협정과 같은 해의 CPTPP가 요구한 의무가 이 개정의 배경 가운데 하나였다. 의미 있는 제도 개선이지만, 전통 의복이 지닌 핵심 취약성까지 풀어내지는 못했다. 문화 세계화가 빨라지면서 문화 상징을 둘러싼 경쟁 압력이 그만큼 커지자, 베트남의 디자이너와 문화 단체들은 당국에 아오자이를 국제 IP 기구에 등록하라고 계속 요구해 왔다.[¹⁵]
아오자이 사례는 ASEAN 전반에 공통된 공백을 보여준다. 그 공백이란 문화적 중요성이 큰 전통 복식을 지킬 전문 법적 수단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저작권은 고정된 저작자와 독창성을 요구하고, 상표는 상업적 사용을 요구하며, GI는 지리적 생산 특정성을 요구한다. 전통 의복은 이 가운데 어디에도 깔끔히 들어맞지 않는다. 실제로 2022년 한 학술 연구는 ASEAN에서 전통 의복 보호가 구조적으로 취약하며, 이를 규율할 역내 법적 수단이 없다고 밝혔다. TCE 보호가 국제 IP 틀 안에는 원칙적으로 존재하지만, 대다수 회원국에서 국내 이행이 미흡하다는 것이다.[¹⁷]
필리핀: 토착 직조 문화와 부재한 법적
필리핀은 아세안 패션 IP 문제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례에 속한다. 110개가 넘는 민족·언어 공동체가 저마다 고유한 직조 전통과 문양, 문화적 규범을 이어 갈 만큼 섬유 유산이 풍부하지만, 이를 상업적 도용에서 보호할 실효성 있는 법적 체계는 거의 없다.
필리핀 토착 직물은 수십 년째 현대 패션에 쓰여 왔다. 마긴다나오족의 이나울(inaul), 틀볼리족의 트날락(t'nalak), 아클란의 피냐(piña), 마티그살루그 마노보족의 히나보(hinabol) 등이 대표적이다. 하이패션과 정장, 외교 의상에 쓰이면서 이 전통들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그 가시성이 직조 공동체를 위한 보호나 정당한 수익 배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¹⁸]
구조적 문제는 두 논리가 부딪힌다는 데 있다. 많은 전통 문양은 공동체가 함께 지닌 것이자 신성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 특정 맥락에서만 쓰인다. 반면 IP 제도는 개인 소유와 세속적 사용, 일반 시장 거래를 전제로 짜여 있다. 종교 의례와 사회적 위계, 세대 간 전승에 얽힌 문양은 공동체 안 어느 개인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애초에 개인이 등록할 수도 없다. 단체표장과 GI가 부분적인 해법은 될 수 있지만, 생산자 협회와 법적 역량, 정부 지원 같은 기반을 갖춰야 한다. 외딴 지역의 토착 직조 공동체에는 그런 기반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푸가오 유산학교(Ifugao Heritage School) 설립자 말론 마틴(Marlon Martin)은 "법적 개입이 없으면 패션 브랜드가 자사 디자인이라고 주장하는 문양은 결국 원산지 공동체가 아니라 그 브랜드의 것으로 인정되고 만다"고 짚는다.[¹⁸]
이와 관련해 이푸가오 문화유산학교 설립자 Marlon Martin은, 법적 개입이 없다면 패션 브랜드가 창작물로 주장한 문양이 결국 해당 브랜드의 것으로 인식되고, 원 공동체는 배제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문제의 문화 도용 측면은 2020년 크게 공론화됐다. 한 유명 디자이너가 틀볼리족의 상징적 직조공이자 인간문화재(National Living Treasure)인 랑 둘라이(Lang Dulay)의 이미지를 동의도 출처 표기도 없이 작품에 쓴 사건이었다. 틀볼리 공동체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널리 알려졌지만, 법적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현행 필리핀 법은 문화 도용을 소송 대상이 되는 위법 행위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정부는 아직 토착 직물을 보호할 별도 IP 제도를 마련하지 못했다. 다만 2021년 필리핀이 AWGIPC 의장직을 맡은 것은 IP 집행 전반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그만큼 커졌다는 신호이기는 하다.[¹⁹],[²⁰]
발릭 바틱(Balik Batik)을 세운 베로니카 바기오(Veronica Baguio)는 토착민(IP) 공동체와 직접적이고 동의에 기반하며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꾸렸다. 장인과 명시적으로 합의하고 문양의 소유권을 인정하며 법이 요구하지 않는 문화적 규범까지 지킨다.[¹⁹] HABI: 필리핀 직물위원회(HABI: The Philippine Textile Council)도 시장 접근과 문화적 책임을 결합한 공동체 조달 체계를 구축했다. 토착 직조공을 상업 플랫폼에 직접 연결하는 연례 '리캉 하비 마켓 페어(Likhang HABI Market Fair)'가 대표적이다.[²¹] 참고할 모델이지만 산업 전체에 필요한 것은 윤리적 기업의 노력만이 아니라 제도적 보호다.
이런 흐름 속에서 2024년 12월 바기오시에서 제7회 세계 이카트 직물 심포지엄(7th World Ikat Textile Symposium)이 열렸다. ASEAN 안팎의 이카트 직물 관계자들이 모여 문화 도용과 공동체 소유권 관행, 색과 문양 변형의 윤리를 정면으로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는 이 분야의 역내 지식 공유가 상당히 깊다는 점, 그리고 그 지식을 실행에 옮길 구속력 있는 법적 틀은 아직 없다는 점이 동시에 드러났다.[²²]
필리핀의 2026년 ASEAN 의장국 수임은 바로 이 지점에서 기회가 된다. CoE 과제 아래 필리핀이 의장을 맡은 AWGIPC는 개별 회원국이 홀로 만들 수 없는 역내 IP 표준과 집단 보호 장치를 마련할 위치에 서 있다. 토착 직물 문제는 이 과제와 직결된다. CoE의 IP 조화 작업이 상업 창의 자산과 함께 전통 문화 표현까지 다루지 않는다면, 설립 목적으로 삼은 문제의 절반만 푼 셈이 되고 만다.
역내 공통의 양상: 사례들이 공유하는 것
인도네시아 바틱과 태국 실크, 베트남 아오자이, 필리핀 토착 직물을 나란히 놓으면 공통된 역내 구조가 드러난다. 유산의 깊이와 국제적 상업 잠재력을 함께 지닌 문화 자산이 정작 자신을 위해 설계되지 않은 법적 수단에 의존해 보호받고 있다는 점이다. 저작권은 개별 저작자를, 상표는 상업적 브랜드 정체성을, 특허는 기술 혁신을 보호하도록 설계됐다. 전통 문화 표현은 다르다. 공동체가 함께 소유하고 계속 변화하며 특정 장소에 깊이 뿌리내린다. 기존 수단 가운데 이런 법적 성격에 정확히 들어맞는 것은 없다.
그나마 지리적 표시가 이 문제에 가장 잘 맞는 기존 도구이고, ASEAN 지역도 GI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GI 등록은 절차가 더디고 비용도 크며, 탄탄한 제도적 인프라를 요구한다. 무엇보다 등록한 관할 안에서만 보호를 준다는 한계가 있다. 태국에 등록한 태국 실크 GI로는 캄보디아나 베트남 제조사가 유럽 시장에서 비슷한 직물을 '태국식 실크'로 내거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ASEAN CoE가 추진하는 IP 조화는 추상적인 기술 과제가 아니다. 실효성 있는 법적 구제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아세안의 장인 공동체와 유산 생산자, 각국 창의경제가 해마다 경제적 손실과 문화적 권위의 훼손을 겪는 구체적인 시장 실패에 대응하는 일이다. 바틱과 실크, 전통 직조 사례는 국가와 소재만 다를 뿐 같은 구조적 문제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역내 차원의 해결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적어도 네 가지는 필요하다. ASEAN 시장 전역에서 회원국 GI 등록을 서로 인정하는 것, 검증된 유산 원산지 창의 상품을 위한 역내 인증표장을 두는 것, 토착·장인 공동체가 IP 등록 제도에 다가서도록 기술 지원을 하는 것, 그리고 기존 ASEAN 문화 선언의 선언적 문구를 넘어 실제로 집행 가능한 권리로 나아가는 전통 문화 표현 보호의 틀을 세우는 것이다. 2025년 5월 채택된 ASEAN 창의경제 지속가능성 프레임워크는 'IP에 대한 공통 접근'을 13개 전략 우선순위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CoE는 바로 그 우선순위를 실행으로 옮길 제도적 매개다. [²³]
[8] US Trade Representative (USTR). "2025 Special 301 Report on Intellectual Property Protection and Enforcement." April 2025. https://ustr.gov/about/policy-offices/press-office/press-releases/2025/april/ustr-releases-2025-special-301-report-intellectual-property-protection-and-enforcement
[9] TravelText. "Garuda–Batik Pikachu Livery: A Collaboration Between Global & Local IP." November 2024. https://traveltext.id/2024/11/10/garuda-batik-pikachu-livery-a-collaborations-between-global-local-ip/
[10] National Bureau of Asian Research (NBR). "Intellectual Property Challenges in the ASEAN Region." 2021. https://www.nbr.org/publication/intellectual-property-challenges-in-the-asean-region/
[11] Harding et al. "Geographical Indication in Indonesia: A Review on the Spatial Distribution and Classification of Geographical Indication–Registered Products." Journal of World Intellectual Property, November 2024. https://onlinelibrary.wiley.com/doi/full/10.1111/jwip.12332
[12] Jim Thompson Fabrics. "About Jim Thompson." https://www.jimthompsonfabrics.com/our-story/about-us
[13] Travelindex / Visit Thailand. "Jim Thompson Celebrates 75 Years: Weaving Heritage into a Global Lifestyle Legacy." March 6, 2026. https://www.visitthailand.net/experiences-in-thailand/jim-thompson/jim-thompson-celebrates-75-years-weaving-heritage-into-a-global-lifestyle-legacy/
[14] Travel and Tour World. "Thailand Tourism Gets a Boost as Jim Thompson Showcases Silk Heritage and Cultural Innovation." September 2025. https://www.travelandtourworld.com/news/article/thailand-tourism-gets-a-boost-as-jim-thompson-showcases-silk-heritage-and-cultural-innovation/
[15] Vietnam.vn. "Áo Dài — Vietnam's Cultural 'Passport'." March 2026. https://www.vietnam.vn/en/ao-dai-tam-ho-chieu-van-hoa-viet
[16] Cultural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Initiative. "Traditional Cultural Expressions of the World: Vietnam." 2020. https://www.culturalintellectualproperty.com/post/what-are-the-laws-for-cultural-fashion
[17] Substantive Justice International Journal of Law. "The Legal Protection Towards Traditional Clothes: Intellectual Property Regimes in ASEAN." 2022. https://doi.org/10.56087/substantivejustice.v5i1.165
[18] HABI: The Philippine Textile Council. "Here's Why You Should Be Mindful of the Indigenous Fabrics You Wear." https://www.habiphilippinetextilecouncil.com/blogs/habi-highlights/here-s-why-you-should-be-mindful-of-the-indigenous-fabrics-you-wear
[19] SunStar Davao. "Standing for the IPs." November 2022. https://www.sunstar.com.ph/davao/feature/standing-for-the-ips-social-enterprise-highlights-culture-heritage-through-fashion
[20] Intellectual Property Office of the Philippines. "PH Assumes Chairmanship of ASEAN Intellectual Property Cooperation Group." March 2021. Via NBR: https://www.nbr.org/publication/intellectual-property-challenges-in-the-asean-region/
[21] HABI: The Philippine Textile Council. Likhang HABI Market Fair. https://www.habiphilippinetextilecouncil.com/blogs/habi-highlights
[22] HABI: The Philippine Textile Council. "The 7th World Ikat Textile Symposium Themed 'Ties That Bind — Weaving a Defining Future.'" January 2025. https://www.habiphilippinetextilecouncil.com/blogs/habi-highlights/the-7th-world-ikat-textile-symposium-themed-ties-that-bind-weaving-a-defining-future
[23] ASEAN Secretariat. "ASEAN Creative Economy Sustainability Framework." Adopted at the 46th ASEAN Summit, Kuala Lumpur, Malaysia, May 26, 2025. https://asean.org/asean-creative-economy-sustainability-framewo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