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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AN-KOREA

문화예술-산업동향

인구 배당 시대의 종언: 아세안의 인구 구조 전환과 창 경제라는 승부수

6월 18일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8월 24일

동남아시아의 인구 성장세가 둔화하고 있다. 그러나 아세안(ASEAN)은 인구 위기가 닥치기 전부터 이미 '창의경제(Creative Economy)'라는 해법을 전 세계에 제시해 왔다. 본 고에서는 아세안 창의경제의 현주소와 현장의 실질적인 변화, 그리고 지난해 경주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합의가 이 지역에 열어준 새로운 가능성을 짚어본다.

스스로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가는 ASEAN


수십 년간 동남아시아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는 '인구'였다. 젊고 늘어나는 인구가 만드는 '인구 배당 효과(demographic dividend)'에 힘입어 21세기 중반 세계 4위 경제권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졌다. 그러나 최근 각국의 출생 통계는 다른 흐름을 보여준다.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국가는 태국이다. 2024년, 태국의 연간 출생아 수는 1949년 이래 처음으로 50만 명 밑으로 추락했고, 한 해 동안에만 약 10만 명의 인구가 자연 감소했다. 마히돌대학교 인구학자들은 태국의 합계출산율을 일본보다 낮고 한국이나 싱가포르와 맞먹는 1.0명 안팎으로 추산한다. 50년 뒤에는 현재 6,600만 명인 인구가 4,000만 명 수준으로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온다. 역내에서 인구 규모가 가장 안정적이라고 평가받던 필리핀조차 예외는 아니다. 2025년 국가인구보건조사에 따르면 합계출산율은 1.7명에 그쳤다. 1993년 4.1명에서 크게 낮아진 수치이며, 도시 지역 출산율은 이미 1.5명까지 떨어졌다.


▼ [그림 1] 서로 다른 궤적, 그러나 같은 종착점. 태국은 1990년경 이미 대체출산율 밑으로 떨어졌고, 필리핀은 그로부터 30년 뒤 같은 길을 걷기 시작했으나 하락에 걸린 기간은 태국의 절반에 불과했다.
▼ [그림 1] 서로 다른 궤적, 그러나 같은 종착점. 태국은 1990년경 이미 대체출산율 밑으로 떨어졌고, 필리핀은 그로부터 30년 뒤 같은 길을 걷기 시작했으나 하락에 걸린 기간은 태국의 절반에 불과했다.

이 문제는 두 나라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말레이시아의 합계출산율은 약 1.6명, 베트남은 1.9명 수준이며, 아세안 주요 경제국 가운데 인구 대체 수준을 유지하는 곳은 인도네시아뿐이다. 아세안은 2030년 역내 인구의 약 15%가 60세 이상이 되고, 2035년에는 그 수가 1억 2,7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다만 아세안은 이 문제를 독자적인 관점에서 다룬다. 2026년 6월 필리핀이 아세안 사회문화공동체 의장국 자격으로 연 '실버 경제 고위급 포럼'에서는 고령화를 감내해야 할 위기가 아니라 설계로 풀어야 할 과제로 제시했다. 아세안+3 거시경제조사기구(AMRO)도 줄어드는 인구 배당 효과를 인구 규모가 아닌 기술과 생산성에 기반한 '장수 배당 효과(longevity dividend)'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 [그림 2] 아세안 주요 경제국 중 대체출산율을 유지하는 국가는 인도네시아뿐이다. 태국은 이미 일본을 밑돌며 한국의 수치에 근접해 가고 있다.
▼ [그림 2] 아세안 주요 경제국 중 대체출산율을 유지하는 국가는 인도네시아뿐이다. 태국은 이미 일본을 밑돌며 한국의 수치에 근접해 가고 있다.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닌, ASEAN 스스로 설정한 어젠다


논의를 이어가기에 앞서 흔한 오해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창의경제'는 동남아시아가 인구 감소에 쫓겨 외부에서 수입한 대응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먼저 글로벌 의제로 제시한 개념이다. 일례로, 2021년을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창의경제의 해'로 지정한 2019년 유엔총회 결의안을 주도한 국가는 인도네시아였고 필리핀과 태국이 공동 제안국으로 힘을 보탰다. 또한 인도네시아는 이보다 앞선 2018년 발리에서 제1회 '세계창조경제회의(WCCE)'를 개최한 바 있다.


인구 구조의 변화는 이 의제의 중요성을 더할 뿐이다. 과거 경제 다변화를 위한 선택지였던 창의경제는 이제 구조적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었다. 노동력의 양적 팽창이 멈춘 상황에서는 개개인이 창출하는 가치에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창의산업은 노동자의 수보다는 상상력, 지식재산권(IP), 그리고 문화적 고유성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기에 적합한 분야다.


제도적 기틀 다지는 ASEAN 정부들


ASEAN 각국 정부가 창의경제에 거는 기대는 제도 변화에서 확인된다. 필리핀은 2022년 창조산업개발법을 제정해 장관급 위원회와 통계 체계를 마련했다. 공식 위성계정에 따르면 2025년 필리핀 창의경제 규모는 2조 1,200억 페소로 GDP의 약 7.6%를 차지했으며, 정부는 2030년까지 아세안 창의경제를 선도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인도네시아는 2024년 말 창의경제를 독립 부처로 격상했고, 태국은 영화부터 음식까지 11개 산업을 총리 주재 체계 아래 묶는 집행기관 THACCA를 택했다.

아직 성과가 입증된 모델은 없다. 필리핀 창의산업 성장률은 2025년 6.9%로 둔화했고 전문가들은 숙련 인력 부족을 지적한다. 태국의 관련 지출도 의회의 감시를 받고 있다. 다만 서로 다른 세 거버넌스 실험이 동시에 진행되는 만큼, 다른 ASEAN 회원국은 그 성과와 한계를 함께 참고할 수 있다.


통계보다 더 선명하게 변화를 증명하는 콘텐츠 시장


정책적 움직임보다 더욱 확실한 증거는 대중이 주목하는 콘텐츠 시장에서 찾을 수 있다. 크게 세 가지 변화가 감지된다.


첫째, 현지 콘텐츠가 자국 시장을 되찾고 있다.

인도네시아 영화는 현재 자국 박스오피스 매출의 약 65%를 차지하고 있으며, 2025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점보(Jumbo)'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역대 최고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 베트남 역시 '마이(Mai)'(2024) 등 로컬 영화들이 할리우드 대작들을 앞서며 흥행 달리고 있다. 


공감할 만한 도시의 일상과 정서적 울림, 음력설 개봉 전략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2,200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린 쩐탄 감독의 '마이(Mai)'(2024).

둘째, ASEAN 내부의 문화시장 형성이 가속화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태국 영화 『할머니가 죽기 전에 백만장자가 되는 법(How to Make Millions Before Grandma Dies)』(2024)이다.

손자가 임종을 앞둔 할머니를 돌보는 이야기를 담은 이 가족 드라마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등에서 태국 영화 사상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으며, 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예비후보에도 선정되었다. 이 영화가 주목받은 이유는 단순한 흥행 성과 때문만은 아니다. 고령화, 가족 규모의 축소, 돌봄 문제 등 아세안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변화가 하나의 콘텐츠로 제작되어 역내에서 먼저 공감과 소비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태국의 BL(Boys' Love) 드라마는 비교적 적은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마닐라에서 상파울루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팬덤을 형성하며 새로운 문화산업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셋째, 창의 서비스업이 가치사슬의 상단으로 이동하고 있다.

외주 애니메이션과 후반작업에 머물던 산업이 독자 IP 개발 중심으로 옮겨 가고 있다. 필리핀의 위성계정에도 이 변화가 나타난다. 자카르타에서 호치민시에 이르는 게임 개발사들도 남의 작품을 대신 만드는 데서 벗어나 자체 타이틀을 내놓기 시작했다. 세 변화가 가리키는 방향은 같다. ASEAN이 다른 지역의 노동을 대신 수행하던 곳에서 자기 이야기를 소유하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노동력이 줄어드는 경제에 꼭 필요한 전환이다.


관광 산업: 창의경제의 종착지가 아닌 수익화의 통로


ASEAN 대다수 국가에서 창의경제 정책은 결국 '관광 산업 진흥'과 맞닿는다. 이는 정책의 실패라기보다 경제 구조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내수시장의 성장세가 둔화되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수요를 해외에서 유입해야 하며, 관광은 이미 대부분의 ASEAN 국가가 일정한 경쟁력을 갖춘 대표적인 서비스 수출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자칫 '창의경제'가 단순히 관광이나 이벤트를 홍보하기 위한 새로운 명칭에 그칠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고령화 사회에서는 값싼 노동력에 의존해 관광객 수만 늘리는 관광객 수 확대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 관광객 증가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고, 노동 인구는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안은 '방문객 1인당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인구구조 변화는 관광의 무게중심을 '양'에서 '방문객 한 사람당 가치'로 옮기도록 압박한다. 고령화 사회에서 관광객 수만 늘리는 전략은 노동집약적이어서 오래가기 어렵다. 남은 길은 방문객 한 명이 남기는 가치를 높이는 것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창의 콘텐츠가 힘을 발휘한다. 스크린 투어리즘은 해외 제작비를 오래 남는 여행지 IP로 바꾼다. 태국은 로케이션 인센티브로 HBO의 '화이트 로터스(The White Lotus)'를 코사무이(Koh Samui)에 유치해 방문객을 크게 늘렸다. 광고를 구매한 것이 아니라 제작에 공동 투자해 얻은 효과다. 축제 정책도 행사 개최에서 수출 가능한 IP 개발로 이동하고 있다. 송끄란(Songkran)을 세계적 축제 브랜드로 키운 사례가 대표적이다. 싱가포르는 2024년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의 동남아시아 유일 공연을 유치해 수억 달러로 추정되는 인바운드 지출을 만들어 냈다. 문화적 독점성을 인프라처럼 활용한 방문객당 가치 실험이다. 사원과 기록물, 역사 지구를 AI와 XR로 재현하는 몰입형 유산 사업도 같은 흐름에 있다. 인력을 비례해 늘리지 않고도 체류 경험과 지출을 높일 수 있어 노동력이 줄어드는 사회에서 특히 유리하다.


진짜 전략과 이름만 바꾼 관광 홍보를 가르는 기준은 수익의 행방이다. 관광으로 번 돈이 일회성 소비로 끝나는지, 아니면 스튜디오와 인력, 권리 인프라 같은 상류 부문에 다시 투자되는지가 관건이다. 여기서 참고할 만한 사례는 한국이다. 한국은 콘텐츠 IP 수출이 먼저 성장하고 관광이 뒤따랐다. 반면 ASEAN은 반대로 관광 기반에서 출발해 IP를 키우려 한다. 한국의 경험은 이 경로도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주지만, 관광 수익이  IP와 창의산업 생태계에 재투자 될 때에만 선순환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불교 의례와 가족 전통, 대규모 물싸움뿐 아니라 성희롱과 음주운전이라는 어두운 면도 함께 지닌 태국의 물 축제 송끄란 (Tim Pile,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Tim Pile, South China Morning Post)
불교 의례와 가족 전통, 대규모 물싸움뿐 아니라 성희롱과 음주운전이라는 어두운 면도 함께 지닌 태국의 물 축제 송끄란 (Tim Pile,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Tim Pile, South China Morning Post)

다자간 협력의 새 지평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는 ASEAN이 활용할 수 있는 두 가지 다자간 성과를 남겼다. 경주 선언(Gyeongju Declaration)은 APEC 정상 문서 최초로 문화·창의산업을 역내 성장 동력으로 인정했다. 정상들은 저출생과 고령화를 다룬 포럼 최초의 종합 합의인 '인구변화에 관한 APEC 협력 프레임워크(APEC Collaborative Framework for Demographic Changes)'도 채택했다. 인구변화를 개별 국가의 복지 문제가 아니라 함께 풀어야 할 경제 의제로 끌어올린 것이다.

동남아시아에 열린 실질적인 기회는 세 가지다. 첫째, 다자간 명분이 생겼다. 재정·무역 부처가 창의산업 예산을 설명할 때 APEC 정상들의 합의 문구를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둘째, ASEAN과 APEC을 잇는 연결고리가 강화됐다. ASEAN 회원국 열 곳 가운데 일곱 곳이 APEC 회원국이며, 2026년 ASEAN 의장국인 필리핀도 두 기구에 모두 속한다. 필리핀은 문화·창의산업(CCI)과 인구 문제를 두 기구 사이에서 연결하기에 유리한 위치다. 셋째, 실제로 활용할 인프라가 생겼다. APEC AI 이니셔티브의 역량 강화 의제는 현지의 지식과 문화, 언어를 통합 대상으로 명시했다. 경주에서 약속한 아시아·태평양 AI 센터(Asia-Pacific AI Center)와 2027년을 목표로 유엔 기구들과 함께 조성하는 글로벌 AI 허브(Global AI Hub)도 ASEAN이 AI 산업을 처음부터 구축하지 않고 창의경제의 기술 기반을 확보할 통로가 될 수 있다. 다만 협력은 거버넌스 틀에만 머물지 않고 문화 생산을 중심으로 설계해야 한다.


HBO 드라마 『The White Lotus』 시즌 3 촬영 이후 태국 코사무이의 럭셔리 관광 수요가 크게 증가했으며, 관광 관심도는 약 300% 상승한 것으로 분석된다. 글로벌 인지도를 높이며 촬영지를 찾는 '세트 제팅(Set-jetting)' 관광의 결과이다.
HBO 드라마 『The White Lotus』 시즌 3 촬영 이후 태국 코사무이의 럭셔리 관광 수요가 크게 증가했으며, 관광 관심도는 약 300% 상승한 것으로 분석된다. 글로벌 인지도를 높이며 촬영지를 찾는 '세트 제팅(Set-jetting)' 관광의 결과이다.

앞에 놓인 더 어려운 질문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창의경제가 농업과 제조업, 돌봄 분야의 노동력 감소를 대신할 수는 없다. 측정 방식도 아직 일관되지 않으며, 필리핀의 창의경제 위성계정은 일반적인 사례라기보다 예외에 가깝다. AI 역시 소규모 창작팀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동시에 동남아시아 청년들이 기대해 온 초급 일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환은 실제로 진행되고 있으며, 역내 국가들이 스스로 선택한 흐름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동남아시아는 인구 구조의 변화가 창의경제를 생존의 문제로 만들기 전부터 이를 세계적 의제로 제시했다. 각국 정부는 관련 제도를 만들고 있고, 대중은 이미 현지 콘텐츠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다자 협력 체계도 뒤따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10년의 과제는 이러한 흐름을 통계 체계와 인력 양성 경로, IP 제도, 국경을 넘는 문화 유통망으로 구체화해 창의경제에 맡겨진 역할을 감당할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주요 참고 문헌
  • 2025 APEC Leaders' Gyeongju Declaration; APEC AI Initiative; APEC Collaborative Framework for Demographic Changes (Nov. 2025)

  • UN General Assembly Resolution on the International Year of Creative Economy for Sustainable Development (A/RES/74/198, 2019); Siem Reap Declaration on Promoting a Creative and Adaptive ASEAN Community to Support the Cultural and Creative Economy (adopted by AMCA, 7 July 2022); ASEAN Comprehensive Recovery Framework; ASEAN Vision 2045

  • Mahidol University IPSR Thailand population briefing (2025); Philippine NDHS 2025; PSA Creative Economy Satellite Accounts (2026)

  • Republic Act No. 11904 (Philippines, 2022); Indonesia Ministry of Creative Economy establishment (2024); Thai soft-power budget reporting, Bangkok Post / Thai Enquirer (2025)

  • ASEAN High-Level Forum on Unlocking the Silver Economy (June 2026); AMRO commentary on the longevity dividend (2026)

  • Box-office records: Jumbo — Cinepoint via The Jakarta Post (June 2025), Deadline (Apr.–May 2025); Mai — Vietnamese box-office records (2024); How to Make Millions Before Grandma Dies — GDH 559 / National Federation of Thai Film Associations, Variety and The Hollywood Reporter (2024–25)

  • JAFF Market–Cinepoint report on Indonesia's theatrical market (2025); Thai tourism data on The White Lotus effect — Tourism Council of Thailand via Bangkok Post (Mar. 2025); Maybank and NUS estimates of the Eras Tour's Singapore impact (Ma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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