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 창의산업 진흥센터(ASEAN CoE): 문화 협력에서 역내 경제 통합으로
최종 수정일: 8월 21일
1. 서론: 제도 전환
아세안(ASEAN)은 그동안 창의경제를 주로 문화예술의 한 분야로 다뤘다. 그러나 2026년 필리핀 의장국이 추진하는 '아세안 창의산업 진흥센터(ASEAN Center of Excellence for Creative Industries, 이하 CoE)'의 설립은 이러한 접근의 변화를 보여준다. CoE는 창의 부문을 뜻하는 '오렌지 경제(Orange Economy)'와 '디지털 경제'의 조화를 추진하는 역내 최초의 전담 기관이다. 국가별로 나뉜 창의산업을 하나의 역내 경제 기반으로 연계하는 것이 목표다.

필리핀 통상산업부(DTI)가 '우선 경제과제(PED)'로 공식 지정한 CoE는 디지털 미디어, 영화, 음악, 디자인 등 창의산업 전반에 걸쳐 정책 논의와 역량 강화, 분야 간 협력을 지원하는 거점 역할을 맡는다.¹
2. 역사의 궤적: 담론에서 실행 단계로
이 마스터플랜은 갑자기 등장한 구상이 아니다. 20년에 걸쳐 발전해 온 결과다.
2004~2009년 (개념 형성기): 2000년대 중반부터 아세안 회원국들을 중심으로 창의성을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바라보는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태국은 ‘창의적 태국(Creative Thailand)’ 정책을 추진했고, 인도네시아 역시 창의성을 경제 발전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2011년 ('글로벌 서비스 허브' 연구): 동아시아·아세안경제연구센터(ERIA)의 초기 연구에서는 애니메이션, 디자인, 디지털 출판 등을 포함한 창의 서비스가 아세안경제공동체(AEC) 체계에서 역내 통합을 이끌 핵심 부문으로 제시됐다.²
2020–2021년 (코로나 팬데믹 전환점): 2020년 11월 제37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아세안 포괄적 회복 프레임워크(ASEAN Comprehensive Recovery Framework, ACRF)는 창의경제를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회복과 경제적 회복탄력성을 뒷받침할 잠재력이 높은 분야로 규정했다. 이후 이행계획에서는 아세안 창의경제 실무그룹(ASEAN Working Group on Creative Economy)의 설립을 제안하고, 문화·창의산업을 위한 아세안 센터(ASEAN Centre for Cultural and Creative Industries, ACCCI)를 여러 분야를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구축하자는 방안을 공식적으로 제시했다.³
2022년 (씨엠립 선언): 캄보디아 의장국 아래 아세안은 2022년 7월 7일 창의적이고 적응력 있는 아세안 공동체를 조성해 문화·창의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씨엠립 선언(Siem Reap Declaration on Promoting a Creative and Adaptive ASEAN Community to Support the Cultural and Creative Economy)을 채택했다. 이는 상설적인 창의경제 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최초의 장관급 차원의 공식적 기반을 제공했다.⁴
2025년 5월 (공식 채택 단계): 씨엠립 선언을 기반으로 하고, 아세안-영국 창의경제 발전 프로그램(ASEAN–UK Advancing Creative Economy Programme)을 통한 영국의 지원과 협력을 바탕으로 공동 개발된 아세안 창의경제 지속가능성 프레임워크(ASEAN Creative Economy Sustainability Framework)가 2025년 5월 26일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46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정상들의 승인을 받아 채택됐다. 이 프레임워크는 역내 창의경제 통합을 위한 전략적 ‘청사진’을 제시했다.⁵
2026년 (제도적 인프라 구축 단계): 필리핀의 우선 경제과제(Priority Economic Deliverable, PED)는 2025년 프레임워크를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단계로, 아세안 창의산업 진흥센터(CoE)의 공식 설립을 추진한다. 이를 통해 그동안 전략적 비전과 정책적 논의에 머물렀던 창의경제 통합 구상을 실제 제도적 인프라로 전환하게 된다.⁶
3. 차별화 전략: 유네스코(UNESCO)나 APEC과는 무엇이 다른가
정책 입안자들이 CoE의 진가를 제대로 이하려면 기존 국제기구들과의 명확한 차이점을 읽어내야 한다.
특징 | ASEAN CoE (ACE–CI) | UNESCO (UCCN) | APEC |
주요 목표 | 경제 통합: 통합된 역내 시장과 무역 표준 구축 | 문화 다양성: 유산 보호와 도시 문화 정체성 증진. | 무역 자유화: 태평양 지역 창의 재화·서비스의 장벽 완화 |
범위 | 역내 (2025년 10월 가입한 동티모르 포함 11개 회원국) | 글로벌 (개별 도시 중심) | 환태평양 (21개 경제체) |
운영 방식 | 직접 개입: IP 법제 표준화, 자금 조달 접근성 개선, 인력 자격 인증 | 네트워킹: '창의도시'(예: 바기오, 반둥) 간 모범 사례 공유 | 정책 발굴·육성: 정책 보고서와 고위급 무역 권고안 발표 |
데이터 초점 | ASEAN 고유의 총부가가치(GVA)를 추적하기 위한 역내 지표 조화 | 지속가능한 도시 발전에 대한 질적 영향 | 글로벌 수출입에 대한 포괄적 무역 데이터 |
주요 차이점: 유네스코(UNESCO)가 문화를 공공재로 바라보고, APEC이 무역 흐름에 초점을 맞춘다면, ASEAN CoE는 ‘운영 촉진자(Operational Catalyst)’로서 기능한다. ASEAN CoE는 창의산업 분야의 중소기업(MSME)이 역내 규제를 파악하고 국경을 넘어 자본에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원스톱 창구(one-stop shop)’ 역할을 수행하도록 설계됐다.
4. 기능적 축
CoE는 개별 국가가 단독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시장 실패'에 대응하도록 설계됐다.
A. IP 가치평가와 조화
역내 창작자들이 부딪히는 가장 큰 벽은 지식재산(IP)을 은행 대출 담보로 쓸 수 없다는 점이다. CoE는 아세안 지식재산협력 작업반(AWGIPC)과 함께 IP 가치평가의 역내 표준을 만들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필리핀 애니메이터나 태국 게임 개발자도 자신의 무형 자산을 담보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DTI 차관 앨런 B. 겝티(Allan B. Gepty)는 이 과제를 이렇게 강조했다. "아이디어와 발명, 디자인, 창작물이 지닌 금융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 이해관계자들이 자신의 무형 자산이 지닌 가치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다."⁷
B. '헥사-헬릭스(Hexa-Helix)' 협력 모델
CoE는 전통적인 정부 간 기구와 달리 여섯 주체가 함께 참여하는 헥사-헬릭스 모델을 채택했다.
정부: 정책과 규제
학계: 아세안 전역의 창의 교육과정 표준화
산업계: 시장 수요 제시
시민사회: 포용성 확보(토착·지역 공예)
미디어: '메이드 인 아세안(Made in ASEAN)' 브랜드 홍보
디지털/기술: 유통 인프라 제공
C. 역내 창작 인력 인증
CoE는 창작 전문가를 위한 상호인정협정(Mutual Recognition Arrangement, MRA) 도입을 추진한다. 간호사와 엔지니어를 대상으로 이미 시행되고 있는 상호인정협정을 모델로 삼아, 그래픽 디자이너, 음향 엔지니어, 애니메이터 등 창작 인력의 역량을 회원국 간 상호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통해 회원국 간 창작 인력의 이동을 촉진하고, 역내에서 보다 유연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인력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5. 2026년 전략적 전망
창의산업개발위원회로 주도권을 쥔 필리핀 앞에는 시급히 돌파해야 할 3개의 관문이 놓여 있다.
사무국 소재지 확정: 활동을 조율할 상설 오프라인 또는 온·오프라인 혼합형 본부 마련
디지털 창의기업 등록부(Digital Creative Registry): B2B 연계를 위한 검증된 창의기업의 역내 데이터베이스 구축
지속가능 재원 구조 확보: 공여자 의존(예: 아세안-영국 창의경제 증진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민관 협력을 통한 자립형 모델로 이행.
6. 결론
CoE는 문화 지원을 넘어 창의산업을 경제정책의 한 축으로 다루려는 구조적 시도다. 아세안이 자체 IP와 통합 데이터, 역내 노동 기준을 갖추고 세계 창의산업에서 생산자 역할을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통계에 따르면 세계 창의경제는 2조 달러가 넘는 가치를 창출하고 약 5,000만 개의 일자리를 제공하며, 동남아시아의 비중도 커지고 있다. CoE는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기 위한 아세안의 주요 정책 시도다.
참고 문헌
[11] ASEAN Main Portal. "ASEAN Tackles Trends, Challenges Shaping Creative Economy." November 16, 2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