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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AN-KOREA

문화예술-산업동향

동남아시아, 자국어 중심의 AI 시대를 열다 (2부)

8월 27일
9분 분량

열한 개의 목소리, 그리고 창의경제를 향한 세 가지 화두

들어가며

1부에서는 싱가포르의 'SEA-LION' 프로젝트를 통해 '언어 주권' 부재라는 문제의식과 동남아시아가 자국어 중심의 AI를 구축하려는 배경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SEA-LION은 이 거대한 흐름의 한 축일 뿐이다. 2부에서는 동남아시아 전역의 언어 모델 생태계 지형을 종합적으로 조망하고, 누가 어떤 전략으로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살펴보며, 이 움직임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창의경제에 던지는 세 가지 근본적인 화두를 다룬다.


I. 역내 지형: 하나의 거친 물결, 수많은 갈래


동남아시아의 언어 모델 생태계는 크게 아세안(ASEAN) 전역을 아우르는 모델개별 국가 독자 모델이라는 두 가지 층위로 나뉜다.


ASEAN 전역 지향 모델

모델

개발 주체

주요 특징 및 기능

SEA-LION

AI 싱가포르(AI Singapore, 싱가포르 국가 프로젝트)

동남아 11개 이상 언어 지원, 완전 개방형 MIT 라이선스, 멀티모달 및 에이전트 기능 확장

SeaLLMs

알리바바 다모 아카데미(Alibaba DAMO Academy)

상용 및 개방형 모델의 혼합 형태, 동남아 언어 사용자층 집중 타깃팅

Sailor / Sailor 2

SEA AI Lab 및 학계 연합

큐원(Qwen) 기반 오픈소스 언어 모델

이 세 모델은 SEA-HELM 등 역내 벤치마크 평가에서 서로 비교 대상이며, ASEAN의 표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다.


[사진 설명] 2024년 11월 14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Sahabat-AI' 출범식 현장. (왼쪽부터) 비크람 신하(Vikram Sinha) IOH 최고경영자, 젠슨 황(Jensen Huang) 엔비디아(NVIDIA) 창업자 겸 CEO, 에릭 토히르(Erick Thohir) 인도네시아 국영기업부 장관, 파트릭 왈루조(Patrick Walujo) GoTo 최고경영자.
[사진 설명] 2024년 11월 14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Sahabat-AI' 출범식 현장. (왼쪽부터) 비크람 신하(Vikram Sinha) IOH 최고경영자, 젠슨 황(Jensen Huang) 엔비디아(NVIDIA) 창업자 겸 CEO, 에릭 토히르(Erick Thohir) 인도네시아 국영기업부 장관, 파트릭 왈루조(Patrick Walujo) GoTo 최고경영자.

국가별로 다변화되는 전략

여기서부터 흥미로운 점은 ASEAN이 하나의 목소리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국은 자국의 여건에 맞춰 서로 뚜렷하게 다른 경로를 택하고 있다.

싱가포르: SEA-LION 외에도 MERaLiON을 개발했다. MERaLiON은 SEA-LION과 함께 싱가포르의 두 국가적 LLM 가운데 하나다. 2024년 12월 출시 이후 9만 회 이상 다운로드되며 현지의 고유한 뉘앙스와 맥락을 이해하는 AI에 대한 높은 수요를 보여줬다. 특히 음성·오디오 처리와 공감형 응답에 강점을 보인다.

인도네시아: 데이터 주권의 길을 택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단순히 서버를 유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디지털 주권 강화에 힘을 싣고 있다. 인도삿(Indosat)의 Sahabat-AI 이니셔티브를 통한 엔비디아의 솔로(Solo) 투자는 연산 자원을 단순히 보관하거나 운영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지 맥락과 국가적 데이터 우선순위를 반영해 인도네시아어 대규모 언어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인프라를 빌려 쓰는 것이 아니라 지능 자체를 고도화하고 주도하려는 야심을 보여준다.


Typhoon은 태국어에 특화된 오픈소스 대규모 언어 모델(LLM) 개발을 목표로 하는 첨단 연구 이니셔티브다. 최첨단 AI 혁신의 허브로서 실제 활용 사례에 맞춘 AI 솔루션 개발을 지원하는 오픈소스 모델, 데이터셋, 도구 및 연구 성과를 제공한다. Typhoon의 모델과 API, 그리고 Typhoon Audio와 Typhoon Vision과 같은 연구 프리뷰는 태국어 이해와 멀티모달 AI 역량의 한계를 넓히는 것을 목표로 하며, AI 연구 커뮤니티 내 협업과 혁신을 촉진하기 위해 모델 가중치와 데이터셋, 도구를 무료로 제공한다.
Typhoon은 태국어에 특화된 오픈소스 대규모 언어 모델(LLM) 개발을 목표로 하는 첨단 연구 이니셔티브다. 최첨단 AI 혁신의 허브로서 실제 활용 사례에 맞춘 AI 솔루션 개발을 지원하는 오픈소스 모델, 데이터셋, 도구 및 연구 성과를 제공한다. Typhoon의 모델과 API, 그리고 Typhoon Audio와 Typhoon Vision과 같은 연구 프리뷰는 태국어 이해와 멀티모달 AI 역량의 한계를 넓히는 것을 목표로 하며, AI 연구 커뮤니티 내 협업과 혁신을 촉진하기 위해 모델 가중치와 데이터셋, 도구를 무료로 제공한다.


태국은 기술 외교를 앞세우고 있다. 태국 총리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Jensen Huang), 애플의 팀 쿡(Tim Cook) 등 글로벌 기술 기업의 주요 인사들을 직접 만나 유치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친환경 데이터센터에 장기적으로 저렴한 재생에너지 전력을 보장하는 녹색 유틸리티 요금제를 제시하고 있다. 모델 차원에서는 SCB 10X가 개발한 Typhoon이 대표 주자다. Typhoon은 SEA-LION과 마찬가지로 태국인들이 무료로 이용하고 추가 개발할 수 있도록 공개됐다. Typhoon의 창의경제적 활용 가능성은 구체적이다. Mistral-7B를 기반으로 태국어 어휘를 확장하고, 태국어의 어휘와 맥락, 문화적 뉘앙스에 맞춰 사전학습을 최적화했다. 따라서 현지 콘텐츠를 다루는 작업에서 특히 강점을 발휘한다. 태국어 고객 서비스 챗봇이나 금융 자문 어시스턴트처럼 현지의 표현을 글로벌 모델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해야 하는 분야가 대표적이다. 현지 모델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답도 여기에 있다. 글로벌 모델이 평준화해 버리기 쉬운 말투와 관용 표현, 존칭 표현을 정확히 다루는 것이 바로 현지 모델의 존재 이유이자 경쟁력이다.

이러한 논리는 역내 전반에 확산 중이다. 말레이시아의 MaLLaM은 말레이시아 데이터를 기반으로 처음부터 학습되었으며, 이를 통해 다언어 사용과 코드스위칭이 일상화된 말레이시아의 언어 환경, 즉 일상적인 말레이시아인들의 언어에 배어 있는 '맹글리시(Manglish)'의 특성에 더 잘 대응할 수 있다. 이는 진정성 있는 현지 광고, 대사, 각본 작성에 핵심적인 요소다.

베트남과 말레이시아는 기술적으로도 가장 야심 찬 선택을 한 국가들에 속한다. SEA-LION, 베트남의 PhoGPT, 말레이시아의 MaLLaM은 동남아시아에서 처음부터 사전학습한 소수의 모델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역내 대부분의 모델이 기존 파운데이션 모델을 미세조정하는 것과 달리, 이들 모델은 처음부터 자체적으로 구축됐다.

말레이시아는 인프라 측면에서도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AI 분야의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재정 인센티브와 인프라 구축에 집중해 온 점이 두드러진다.


역내 지형이 시사하는 구조적 특징

이러한 지형을 살펴보면 두 가지 구조적 특징이 드러난다.

첫째, 기반 모델의 다변화다. 2020~2022년(챗GPT(ChatGPT) 이전)에는 동남아시아의 모든 모델이 미국의 기반 모델에 의존했다. 그러나 2023년부터 현지 이니셔티브, 프랑스의 Mistral, 국제 협력 프로젝트 등으로 기반 모델의 출처가 다변화되기 시작했다. 2024년에는 역내 LLM의 수가 두 배로 늘었으며, 중국산 모델, 특히 큐원이 신규 모델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둘째, 통합의 어려움이다. 회원국들은 서로 상당히 다른 AI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재정 인센티브와 인프라에, 인도네시아는 데이터 주권과 현지어 모델에, 태국은 기술 외교와 에너지 정책에 각각 중점을 둔다. 국가 차원에서는 모두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이를 종합해 보면 동남아시아에서 단일하고 구속력 있는 AI 규제 체계를 도입하기 어려운 이유가 분명해진다. 정치 체제, 경제적 역량, 기술 발전 수준이 매우 다른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균일한 지역을 전제로 설계된 하나의 글로벌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실용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다양성과 불균등성은 ASEAN의 문화·창의경제 정책 전반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언어 모델은 이러한 특성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렌즈와도 같다.


II. 창의경제를 향한 세 가지 물음


이제 핵심으로 들어가 보자. 이 언어 모델의 확산은 동남아시아의 장기적인 창의경제에 어떤 물음을 던지는가?


질문 1: 데이터는 누구의 것인가: 자산이 된 '유산'의 양날의 검

‘문화유산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데이터 자산이다.’ 이보다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한 주장은 없다. AI가 현지 방언 처리에서 글로벌 대형 모델을 앞설 수 있다는 사실은 문화·언어 유산이 경쟁 자산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태국과 베트남은 AI가 동양의 사회적 가치보다 서구의 사회적 가치를 의도치 않게 반영하는 '알고리즘 편향'을 방지하기 위해 현지어 모델에 투자하고 있다.

창의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낙관적인 시나리오는 분명하다. 한 지역의 설화, 방언, 구전 전통, 아카이브가 AI 학습 데이터로 '자산화'되면, 오랫동안 저평가되어 온 문화유산이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얻게 된다. 이는 창작자와 소규모 기관에도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다. ASEAN 문화정책 보고서가 지적하듯, 디지털 플랫폼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문화 교류가 민주화되었고, 소규모 조직과 개인 창작자도 역내외의 문화적 논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동일한 보고서 내에서 곧바로 그 이면을 지적한다. 디지털 전환은 지역 및 토착 콘텐츠를 희생시키면서 문화 콘텐츠의 동질화를 초래할 수 있다. 여기에 현지 창작자에게 불리한 수익 배분 구조, 디지털 불법복제, 지식재산권 보호 문제 등 보다 구조적인 문제도 뒤따른다.

여기에는 곱씹어 볼 만한 역설이 있다. 문화유산을 데이터로 '자산화'하는 바로 그 과정이 동시에 유산을 본래의 창작자와 공동체로부터 유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자바의 구전 설화나 와양 쿨릿(Wayang Kulit) 그림자극의 정교한 서사 구조, 손으로 그린 바틱(Batik) 문양의 모티프가 새로운 각본과 이미지를 생성하기 위해 모델의 가중치에 들어가는 순간, 그 자산은 누구의 소유인가? 이를 수집해 학습시킨 기관의 것인가, 아니면 천 년 동안 이야기를 전승해 온 달랑(Dalang, 인형극 명인) 공동체의 것인가? 개별 창작자는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는가, 아니면 대대로 전승된 기예가 테크 기업의 기능 업데이트를 위해 그저 무분별하게 채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한 답은 문화정책에 달려 있다.

데이터 출처(provenance)를 둘러싼 법적 문제는 이미 현실적인 쟁점으로 떠올랐다. 큐원 기반 SEA-LION의 경우에도 여러 언어로 된 저작권 보호 웹 자료의 활용을 둘러싸고 데이터 출처와 관련한 법적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질문 2: 유산은 어떻게 지속 가능한 자산이 되는가: '토대 의존'이라는 문제

1부에서 예고한 근본적인 긴장이 이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남의 토대 위에 세운 주권은 과연 얼마나 온전한가?


큐원 기반 SEA-LION 사례는 이러한 딜레마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AI 싱가포르는 중국에서 개발된 기반 모델인 큐원을 채택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지정학적 의존성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오픈 라이선스를 통해 모델을 포크하고 자체적인 개발 경로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우려보다 주권 확보라는 목표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논리는 간단하다. 토대가 남의 것이라 하더라도 오픈소스이므로 언제든 가져와 수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의존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절반만 맞다. 라이선스상 포크가 허용되더라도 기반 모델에 이미 깊이 스며든 편향과 세계관까지 그대로 물려받기 때문이다. 카네기(Carnegie) 보고서가 정확히 제기하는 문제도 여기에 있다. 큐원을 기반으로 구축하는 방식은 중국어와 영어 말뭉치에 내재된 출처 및 데이터 편향에 대한 의문을 낳는다. 서구의 편향에서 벗어나려다 또 다른 편향으로 옮겨가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가 창의경제에서 중요한 이유는 문화 콘텐츠를 제작할 때 '토대의 세계관'이 '산출물의 미학과 서사'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각본을 작성하든, 지역 관광 콘텐츠를 제작하든, 교육 자료를 생성하든 기반 모델의 문화적 기본값은 미묘하게 결과물에 스며든다. 가상에만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주로 중국어 데이터로 학습된 큐원은 특정 문화적 관점이 강하게 내재되어 있으며, 다국어 큐원 모델은 비주류 언어로 프롬프트를 입력할 경우 사후적으로 조정하지 않으면 의도치 않게 중국어로 출력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델에 전통적인 동남아시아 혼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쓰거나 논쟁적인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콘텐츠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면, 모델의 기반 가중치가 자신도 모르게 중국 중심의 규범과 미학을 기본값으로 삼아 작품에 담으려던 현지의 섬세한 맥락을 희석할 수 있다. 지역의 중국산 기반 모델로의 전환을 분석한 한 연구가 경고하듯, 큐원이 개발 주체의 기업적·정치적 배경에 부합하는 관점을 선별적으로 반영한다면, 동남아시아가 경계해야 할 편향은 서구의 편향만이 아니다. 진정한 문화 주권은 라이선스 층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층위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아키텍처 층위에서 결정된다.

인도네시아의 '처음부터 구축하는' 노선과 PhoGPT·MaLLaM의 독자 사전학습은 정책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지만, 토대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경로이기 때문이다. 반면 SEA-LION이 지속적 사전학습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이라는 현실적 논리를 따른 결과다. 주권과 지속 가능성 사이의 상충관계가 바로 동남아시아 창의경제 인프라가 안고 있는 핵심 딜레마인 셈이다.


질문 3: '주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접근성의 격차

마지막 질문은 가장 불편한 문제를 던진다. '주권적 AI'라는 거대한 서사가 과연 역내 창작자와 소규모 문화 주체에게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는가, 아니면 또 하나의 격차를 만들어내는가?


ASEAN 책임 있는 AI 보고서는 뼈아픈 현실을 지적한다. 중소기업(SMEs)은 비용 부담, 현지어 도구의 부족, 실질적인 지침의 부재로 가장 큰 장벽에 직면하고 있으며, 그 결과 접근 가능한 AI 솔루션에서 '사라진 중간층(Missing Middle)'이 생겨나고 있다. 대기업 역시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존 시스템과 위계적인 업무 프로세스가 도입을 복잡하게 만드는 등 조직적·문화적 장벽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이 '사라진 중간층'은 창의경제에 치명적이다. 문화·창의산업의 상당 부분은 프리랜서, 소규모 스튜디오, 독립 창작자, 지역 문화기관이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닐라의 작은 인디 게임 스튜디오가 실제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타갈로그어와 영어를 섞은 ‘태글리시(Taglish)’로 NPC 대사를 끊임없이 생성하려 하거나, 반둥의 1인 웹툰 작가가 창작 작업을 이어간다고 생각해 보자.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상용 글로벌 모델의 높은 건당 API 비용을 감당하며 자유롭게 창작을 반복하기는 어렵다. 바로 이 계층이 자원 부족으로 최첨단 AI에서 배제된다면, '문화 주권'은 국가 규모의 인프라를 위한 구호에 머물 뿐 실제 창작 생태계로 내려오지 못한다.


그럼에도 방향 자체는 옳다. 중요한 것은 역내 국가들이 AI 도구를 단순히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기적인 경쟁력과 혁신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AI를 직접 형성해 나갈 역량을 갖추는 것이다. 로컬 기기에서 구동되는 소형 모델과 도메인 특화를 향한 SEA-LION의 로드맵은 이러한 격차를 좁히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마닐라의 작은 스튜디오가 과금형 API 없이 일반 노트북에서 성능이 뛰어난 현지어 모델을 오프라인으로 구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결국 소형화와 현지화의 결과물이 실제로 개별 창작자의 손에까지 닿을 것인가가 관건이다.



열한 개의 목소리를 위한 정책적 상상력


동남아시아의 언어 모델 물결은 단순한 기술 유행이 아니다. AI 시대에 누가 자기 문화를 자기 언어로 서술할 권리를 갖는가에 관한 거대한 실험이다.

세 물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수렴한다.

  • 소유의 문제: 유산의 자산화는 기회인 동시에 착취의 위험이기도 하다. 창작자와 공동체에 정당한 몫을 돌려주는 거버넌스가 없다면 '문화 AI'는 새로운 형태의 수탈이 될 수 있다.

  • 의존의 문제: 라이선스 차원의 개방성이 진정한 주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데이터와 아키텍처 차원에서 자립하지 못한다면 서구의 편향을 중국의 편향으로 바꾸는 데 그칠 수 있다.

  • 접근성의 문제: 국가 규모의 '주권적 AI'라는 성과가 현장의 소규모 창작자와 문화기관, 즉 '사라진 중간층(Missing Middle)'에까지 닿지 못한다면 주권은 구호에 머물게 된다.


네 번째 지평: 규제가 강화될수록 중요해지는 협력

여기에 앞으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축이 있다. 글로벌 규제가 강화되면서 논의의 틀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그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유럽이다. 2026년부터 EU 인공지능법(EU AI Act)은 모든 범용 AI 모델 제공자에게 학습 데이터셋의 공개 요약본을 게시하도록 요구한다. 또한 EU 저작권 지침(EU Copyright Directive)에 따라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이 AI 학습에 사용되지 않도록 권리를 유보할 수 있으며, 개발자는 학습에 앞서 이러한 권리 유보 여부를 확인하고 해당 콘텐츠를 제외하거나 이용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의무는 유럽의 국경을 넘어선다. EU 인공지능법 제53조는 학습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와 관계없이 모든 범용 AI 제공자에게 집행 가능한 저작권 관련 의무를 부과하며, 그 적용 범위는 EU 역외까지 확대된다.

창작자를 보호한다는 취지는 타당하다. 그러나 소수 언어에는 씁쓸한 역설이 따른다. 브뤼겔(Bruegel)의 한 분석이 경고하듯, 옵트아웃과 이용 허락 요건이 강화되면 학습 데이터셋의 편향이 심해질 수 있으며, 특히 소수 언어와 문화 공동체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주요 AI 모델은 이미 규모가 큰 영어권 공동체에 편향되어 있고 문화적 다양성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용 가능한 데이터가 줄어들수록 이미 데이터가 부족한 저자원 언어가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어 분야에서는 국경을 넘는 협력과 문화 교류의 중요성이 감소하지 않고 더욱 강해진다. 언어 데이터는 본질적으로 초국경적이다. 하나의 언어가 여러 국경에 걸쳐 사용되며, 저자원 언어 모델에 필요한 말뭉치와 아카이브, 동의를 거쳐 구축된 공동체 데이터셋을 어느 한 국가가 혼자 마련하기는 어렵다. 규제가 글로벌 데이터 지형을 분절시키는 상황에서, 자원을 공동으로 활용하고 벤치마크를 공유하며 신뢰할 수 있는 국경 간 데이터 흐름을 구축하는 역량은 AI 시대에 번성하는 언어와 조용히 학습 데이터에서 밀려나는 언어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다. ASEAN 디지털경제 프레임워크 협정(DEFA)와 상호운용 가능한 거버넌스 같은 체계가 그 기반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주권과 협력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언어에 관한 한, 둘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열한 개가 넘는 언어, 그리고 그만큼 다양한 문화. ASEAN이 이러한 다양성을 동질화의 압력과 합법적으로 학습에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의 축소 속에서도 자산으로 지켜내려면, 추구하는 기술적 주권만큼이나 정교하고 세밀한 정책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참고 문

Singapore upgrades MERaLiON with more empathetic AI for SEA — Entelechy Asia. https://entelechyasia.com/2025/05/28/singapore-upgrades-meralion-with-more-empathetic-ai-for-sea/

SEA-LION, Multilingual and Multicultural Context Evaluation — Charunthon Limseelo / Medium. https://medium.com/@boatchrnthn/sea-lion-multilingual-and-multicultural-context-evaluation-5cad7295b46e

An Introduction to "Typhoon", the Market's Most Capable Thai LLM — SCB 10X. https://www.scb10x.com/en/blog/typhoon-innovative-thai-language-model

Speaking in Code: Contextualizing Large Language Models in Southeast Asia — Carnegie Endowment. https://carnegieendowment.org/research/2025/01/speaking-in-code-contextualizing-large-language-models-in-southeast-asia?lang=en

ASEAN Pushes Forward on AI Sovereignty — The Southeast Asia Desk. https://www.thesoutheastasiadesk.com/p/aseans-race-for-ai-sovereignty-begins

SEA-LION GitHub repository — AI Singapore. https://github.com/aisingapore/sealion

Building ASEAN's Responsible AI Ecosystem 2025 — EU-ASEAN. https://eu-asean.eu/wp-content/uploads/2026/01/AI-Paper-Jan-2026_050126.pdf

What Singapore's SEA-LION teaches us about the makings of local-language AI — GovInsider. https://govinsider.asia/intl-en/article/what-singapores-sea-lion-teaches-us-about-the-makings-of-local-language-ai

EU AI Act 2026: New Rules for Training Data and Copyright — Scalevise. https://scalevise.com/resources/eu-ai-act-2026-changes/

AI Training Data Copyright 2026: IP Risks & EU/US Rules — AI Governance Desk. https://aigovernancedesk.com/ai-training-data-copyright-rules/

The European Union is still caught in an AI copyright bind — Bruegel, Analysis 32/2025. https://www.bruegel.org/analysis/european-union-still-caught-ai-copyright-bind


더 읽을거리 및 출처 링크

역내 지형과 국가별 전략

창의경제와 문화정책

  • ASEAN Socio-Cultural Community — Policy Brief No. 31 (2026), ASCC R&D Platform on Media, Culture and Arts

  • "Building ASEAN's Responsible AI Ecosystem 2025," EU-ASEAN, Jan 2026:

규제와 학습 데이터 거버넌스

  • "EU AI Act 2026: New Rules for Training Data and Copyright," Scalevise, Feb 2026

  • "AI Training Data Copyright 2026: IP Risks & EU/US Rules," AI Governance Desk, Jun 2026

  • B. Martens, "The European Union is still caught in an AI copyright bind," Bruegel, Analysis 32/2025

기초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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