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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AN-KOREA

문화예술-산업동향

ASEAN 창의경제 역내 인식 조사

6월 22일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8월 24일

서울을 비롯해 싱가포르, 자카르타, 마닐라의 정책 당국자들은 수년 전부터 '아세안(ASEAN) 창의경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해 왔다. 중장기 청사진을 잇달아 내놓고, 문화 축제에 예산을 투입하며, 정부 간 협력 체계도 구축했다. 하지만 정작 창의경제의 터전에서 살아가는 역내 주민들이 이를 어떻게 체감하고 이해하는지 보여 주는 체계적 데이터는 턱없이 부족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이 공백을 메울 의미 있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2025년 10월, 주아세안 영국대표부와 영국문화원(British Council), ASEAN 사무국이 ASEAN 문화예술고위관리회의(SOMCA)의 지원을 받아 추진한 'ASEAN-영국 창의경제 증진 프로그램'의 하나로 사상 첫 역내 인식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동남아 현지 조사기관 iDNA 솔루션스가 ASEAN 10개 회원국과 동티모르의 일반 대중, 그리고 창의산업 현장 종사자인 '크리에이티브 플레이어(Creative Players)' 4,117명을 조사했다.



익숙함과 성장이 만드는 역설


보고서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은 조사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적 역설'이다. ASEAN 대중의 상당수는 창의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믿지만, 정작 '창의경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고 답한 이들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실제로 일반 대중 응답자의 60%는 역내 창의경제가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창의경제'라는 용어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답한 비율은 47%에 불과했다. ASEAN 시민 10명 중 4명 가량은 자신이 명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대상의 성장을 믿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를 단순한 논리적 모순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일상에서 체감하는 실체와 이를 설명하는 정책 언어 사이의 간극을 보여 주는 결과에 가깝다. 수많은 동남아인은 K-드라마를 정주행하고, 지역 음악 페스티벌을 즐기며, 공예품을 사고, 소셜미디어에서 독립 디자이너를 팔로우한다. 다만 이 모든 문화 소비를 '창의경제'라는 틀로 묶어 인식하지 않을 뿐이다. 창의경제는 이미 삶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이를 설명하는 행정의 언어는 아직 대중의 삶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보고서는 홍보 부족에 따른 정보 전달의 한계를 지적한다. 다시 말하면, '창의경제'라는 개념이 정책 입안자와 산업 협회, 학계 전문가 중심의 담론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ASEAN 창의경제 사업을 기획하는 기관이라면 이번 결과를 정책과 소통 방식을 조정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대상층의 절반이 용어에 익숙하지 않다면 사업명에 '창의경제 지원'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대중과 충분히 소통하기 어렵다. 업계에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와 대중이 일상에서 이해하는 언어 사이의 거리를 줄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현장 전문가들이 부딪히는 진짜 장벽


이번 조사는 일반 대중과 창의산업 현장 종사자의 인식을 나눠 분석했다. 창작 기업과 협회, 정부 기관, 학계 등에서 일하는 '크리에이티브 플레이어'의 응답에서는 일반 대중보다 문제점이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역내 창의경제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걸림돌을 묻자 현장 종사자의 50%가 '역내 조정과 협력의 부재'를 단일 최대 장애물로 꼽았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창의산업 최전선에 선 이들이 체감하는 가장 큰 장벽은 자금도, 기술도, 인프라도 아니었다. 각국과 역내 지원 생태계가 조각조각 흩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다.


자금 관련 수치도 현장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현장 종사자의 25%는 국내외 시장 진출을 가로막는 주요 장벽으로 '자금 접근성 부족'을 꼽았고, 68%는 시장 접근 전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자금난이 세계 창의산업의 공통 과제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시장 접근에 어려움을 겪는 비율은 높은 편이다. 창작물을 만들어도 국경을 넘어 관객과 만날 유통·진출 경로가 충분히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다.


'높은 비용'은 소비자와 창작자 모두에게 높은 벽이었다. 일반 대중 응답자의 53%가 ASEAN의 창의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할 때 가장 큰 걸림돌로 비용 부담을 꼽았다. 단순히 가격이 비싸다는 뜻만은 아니다. 생산비와 비효율적인 유통, 국가 간 소득 격차가 복합적으로 얽힌 구조적 문제다. 다만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는 지역에 단단히 뿌리내린 고유한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비용 장벽을 일부 허문 것으로 나타났다. 진정성과 지역적 울림을 갖춘 작품이 가격 저항을 낮추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모두가 외면하고 있는 지식재산권(IP)의 그늘


보고서에서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주목해서 살펴볼 분야가 지식재산권(IP)이다. 조사 대상 11개국 가운데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태국 등 7개국이 IP 등록·가치평가·상업화·법률 서비스 전반에 '중립적' 태도를 보였다. 문화적 생산물을 지속 가능한 경제 가치로 바꾸는 핵심 고리가 IP라는 점을 고려하면 주목할 결과다. 현장의 중립적인 반응은 기존 지원 제도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거나, 창작자 스스로 IP를 비즈니스의 핵심 자산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보고서는 이 간극을 즉각적인 정책 개입이 필요한 영역으로 짚는다. 2025년 5월 제46차 ASEAN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ASEAN 창의경제 지속가능성 프레임워크'가 IP 관리를 핵심 전략 과제로 명시한 만큼, 정책 목표와 현장의 인식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있다.


숫자와 데이터로 현장을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


여러 한계에도 이번 조사의 가장 근본적인 의의는 ASEAN 창의경제를 비로소 '숫자로 집계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간 관련 논의는 장밋빛 경제 전망과 일부 성공 사례, 정책적 포부에 크게 기대 왔다. 완벽한 조사는 아니더라도, 이번 대규모 조사는 현장의 주체들이 무엇을 체감하고 어디에서 고통받는지 보여 주며 담론의 중심을 현실로 옮겼다.

ASEAN 대중의 43%가 창의경제가 경제 성장과 지역사회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답했고, 54%는 지역의 전통 지혜와 문화가 창의적 생산의 핵심이라고 봤다. 고무적인 결과다. 정책과 산업이 아직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을 뿐, 현장에는 창의산업을 떠받칠 대중적 지지 기반이 이미 마련돼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더 시급한 과제는 인식 부족, 시장 접근성 결여, 역내 조정 부재, IP 이해도 저하라는 선명한 간극이다. 이는 향후 한-아세안 협력 사업을 비롯한 모든 역내 창의경제 프로그램이 마주해야 할 '진짜 지형'이다. 현실은 '활력 넘치는 창의경제'나 '한류 기반의 ASEAN 진출'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보다 훨씬 복잡하고 불균등하다.

이상화된 전망보다 복잡한 현실을 다루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장기적인 성과를 내려면 현장의 조건에서 출발해야 한다.


「ASEAN 창의경제 역내 인식 조사(Regional Perception Poll on the ASEAN Creative Economy)」는 영국문화원 웹사이트에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 4.0(CC BY-NC 4.0) 조건으로 내려받을 수 있다. 「ASEAN 창의경제 지속가능성 프레임워크」는 2025년 5월 제46차 ASEAN 정상회의에서 채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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