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린(Purin) 재단과 특별 영화 기금 프로젝트
- Alex Lee
- 2025년 12월 23일
- 5분 분량
푸린 재단의 영화 펀드 프로그램은 큰 주목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 기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해 왔다. 2017년에 설립된 '푸린 픽처스(Purin Pictures)'를 통해 재단은 정부 지원으로는 거의 충족되지 않는 핵심적인 공백, 즉 상업성보다는 예술성과 독립성을 중시해 제작 단계에서부터 배제되기 쉬운 영화들을 지원하고 있다.
방콕에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현재 미얀마부터 싱가포르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시아 전역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수백만 달러 규모의 자금을 지원하는 지역 차원의 주요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그 영향력은 개별 영화에 대한 지원에 그치지 않고, 창작자들 사이의 지속적인 협업과 교류의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동남아시아 영화가 국제 무대에서 보다 분명하고 집단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재단 설립의 배경
푸린 픽처스는 설립자들의 한 가지 분명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동남아시아에는 생동감 넘치고 강력한 이야기들이 존재하지만, 자금 지원의 부족으로 인해 관객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지역의 영화 제작자들은 뛰어난 재능과 독자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영화 자금 지원 구조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외면해 왔다.
태국의 영화감독인 아노차 수위차콘퐁(Anocha Suwichakornpong)과 아디티야 아사랏(Aditya Assarat)은 이러한 현실을 누구보다 깊이 체감하고 있었다. 아노차의 영화 〈평범한 역사〉는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타이거상을 수상했으며, 두 번째 장편 〈어둠이 내려오기까지〉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뒤 태국의 아카데미상 출품작으로 선정되었다. 아디티야 역시 〈하이소〉와 〈원더풀 타운〉을 통해 부산국제영화제와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등에서 주요 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들의 성과는 신뢰를 확보해 주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충분한 지원이 없을 때 영화 한 편을 완성하고 세계에 선보이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지 몸소 깨닫게 해 주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영화감독 위스라 위칫-와다칸(Visra Vichit-Vadakan)과 함께 푸린 픽처스를 공동 설립하며, 단순한 재정 지원을 넘어 창작 과정 전반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와 공감을 함께 가져왔다.
영화 기금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가
이 재단의 영화 기금은 세 가지 핵심 영역을 중심으로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운영된다.먼저 제작 지원금은 극영화에 3만 달러, 다큐멘터리에 1만 5천 달러를 제공하며, 자금이 가장 부족해지는 개발 단계와 촬영 단계에 집중적으로 투입된다.후반 작업 지원금은 극영화에 5만 달러, 다큐멘터리에 3만 5천 달러를 지원해, 제작 막바지에 자금이 고갈되며 중단되기 쉬운 프로젝트가 완성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세 번째 지원 분야는 영화 관련 활동 지원으로, 최대 5천 달러까지 제공된다. 이 지원금은 영화제, 배급 프로젝트 등 동남아시아 영화를 알리고 유통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에 사용된다. 이러한 포괄적 구조는 좋은 영화가 단지 제작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상영의 장, 관객, 그리고 지속 가능한 산업 기반이 함께 필요하다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기금의 선정 과정은 경쟁이 치열하지만 동시에 창작자를 배려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매년 봄과 여름, 수백 건의 지원서 가운데 4~5개 프로젝트만이 선정되며, 심사는 예술적 완성도와 현실적인 제작 여건을 모두 이해하는 영화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맡는다.
판도를 바꾼 주요 성공 사례들
무울리 수리야(Mouly Surya)의 〈말리나, 네 장으로 된 살인자〉는 푸린 픽처스의 첫 번째 결정적 성공 사례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아시아 초연을 계기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으며, 기금의 신뢰도를 빠르게 확립했다. 이 복수극은 동남아시아의 서사가 적절한 지원을 받을 경우 국제 관객에게도 충분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음을 입증했다.
마르티카 라미레스 에스코바르(Martika Ramirez Escobar)의 〈레오노르는 결코 죽지 않는다〉 역시 기금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 작품은 선댄스, 토론토, 시체스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이는 단순한 예술적 성취를 넘어, 전략적으로 설계된 지원 제도가 지역 영화의 국제적 위상을 실질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칼 조셉 파파의 장편 애니메이션 〈더 미싱〉은 푸린 픽처스가 처음으로 지원한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애니메이션은 일반적으로 더 큰 제작비와 긴 개발 기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독립 영화 제작자에게 특히 도전적인 장르다. 이러한 프로젝트에까지 지원을 확장한 것은 푸린 픽처스가 예술적 다양성에 대해 얼마나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근 수혜작과 그 성과
최근 선정된 지원작들은 푸린 픽처스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동남아시아 영화계의 창작 역량이 얼마나 활발한지를 드러낸다. 2024년 가을에는 총 6편의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에 17만 달러가 지원되었으며, 여기에는 싱가포르의 싱가포르의 다니엘 후이(Daniel Hui)의 〈타인의 꿈〉과 마르티카 라미레스 에스코바르(Martika Ramirez Escobar)의 신작 〈바다의 딸들〉이 포함됐다.
말레이시아 프로젝트 두 편은 전설적인 영화감독 P. 람리를 기리는 작업으로, 동시대 영화인들이 문화적 유산에서 어떻게 영감을 얻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디판 시나 노먼(Diffan Sina Norman)의 〈시토라〉는 사라진 P. 람리(P. Ramlee)의 영화를 ‘대낮의 호러’라는 형식으로 재해석하며, 메갓 샤리잘(Megat Sharizal)의 〈람리를 찾아서〉는 꿈과 냉혹한 현실 사이에 놓인 한 모방 연기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또한 푸린 픽처스는 미얀마의 현재를 다룬 긴급한 동시대 서사도 지원했다. 아웅 나잉 소(Aung Naing Soe)의 〈시인이 전쟁에 나갈 때〉는 미얀마에서 계속되고 있는 정치적 위기를 기록한 작품으로, 푸린 픽처스가 장기적인 예술 발전뿐 아니라 당대의 문화·정치적 요구에도 적극적으로 응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25년 봄 선정작에서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두드러졌다. 총 16만 달러가 지원된 6개 프로젝트 중 4편이 다큐멘터리였으며, 특히 베트남 영화인들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이들 작품은 흐몽 여성들의 세대 간 서사부터 현대 동남아시아에서 변화하는 모성의 의미까지 폭넓은 주제를 탐구했다.
아세안 영화 지원 생태계의 확장
푸린 픽처스는 동남아시아 전반에 걸쳐 눈에 띄는 변화를 촉발했다. 하나의 영화 펀드로 시작한 이 시도는 각국 정부와 기관들이 자체적인 지원 제도를 마련하도록 영감을 주었고, 그 결과 상호 연결된 지원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전체적인 효과가 증폭되고 있다.
싱가포르는 정교하고 다층적인 지원 체계를 선도하고 있다. 2019년 출범한 싱가포르 영화위원회의 동남아 공동 제작 지원금은 지역 협업 프로젝트에 편당 최대 18만 4천 달러를 지원한다. 이 제도는 출범 이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 6개국의 작품 20편을 지원했다.
싱가포르 국제영화제 역시 다큐멘터리와 단편 영화를 대상으로 한 보완적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매년 총 12만 5천 싱가포르 달러를 배분하고 있다. 2025년에는 약 400편에 가까운 지원작 중 7편이 선정되어, 자금 지원에 대한 높은 수요와 지역 영화 제작 수준의 성숙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싱가포르의 전략적 접근인 ‘싱가포르와 함께 만든다(Made With Singapore)’ 정책은 자국 내 제작을 넘어 지역 전체의 성장을 도모하는 역할을 국가의 책무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펀드 유치를 위해 1,470만 달러를 투입한 정부의 결정은 동남아시아의 창작 금융 허브가 되겠다는 강한 의지를 반영한다.
경제적 파급효과와 창의경제의 의미
현재 동남아시아 영화 지원 생태계는 연간 5천만 달러 이상의 투자를 형성하고 있으며, 수백 개의 프로젝트와 수천 명의 창작 종사자를 지원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후원이 아니라, 국제 시장에서 경쟁 가능한 창의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전략적 경제 개발이다.
성공적인 영화는 해외 판매, 스트리밍 계약, 영화제 수상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동시에 작가, 감독, 프로듀서, 기술 인력, 배우 등 다양한 직군의 일자리를 만들어낸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지역 전체의 인적 자본—기술, 경험, 관계망—을 축적한다는 점이다.
지원 제도 간의 연결 효과는 개별 펀드의 영향력을 배가시킨다. 예컨대 푸린 픽처스의 지원을 받은 영화 제작자는 이후 인도네시아의 매칭 펀드, 싱가포르의 공동 제작 지원금, 필리핀의 촬영 인센티브를 연계해 활용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 연결된 구조는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지속적인 경력 발전 경로를 만들어낸다.
국제 영화제에서의 성과는 동남아시아 전체의 문화적 위상을 끌어올린다. 베니스, 칸, 선댄스에서 동남아시아 영화가 주목받을 때, 이는 지역의 창작 역량에 대한 세계적 인식을 변화시키고 다른 영화인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연다.
푸린 재단의 영화 펀드 프로젝트는 이제 하나의 재단 사업을 넘어, 전략적 문화 투자가 어떻게 여러 개발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역적 움직임으로 성장했다. 창의 산업을 통한 경제 성장, 문화 외교를 통한 소프트 파워 확장, 협력적 문화 생산을 통한 지역 통합—all 이 모든 성과는 비교적 제한된 규모이지만 정교하게 설계된 지원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정부 및 국제기구 입장에서 이 생태계는 문화 산업이 단순한 부수 영역이 아니라, 정책적 관심과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핵심 분야임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사례다. 다층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지원 구조가 만들어내는 네트워크 효과는, 지역 협력이 어떻게 개별 국가의 성과를 증폭시키고 실질적인 문화적 연결을 구축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지원 제도의 확장은 아세안을 점점 더 결속력 있고 경쟁력 있는 창의경제 권역으로 자리매김하게 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은 영화들은 정기적으로 국제상을 수상하고, 세계 배급을 확보하며, 동남아시아 창작 역량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기금들이 사라질 뻔했던 이야기들을 보존하고 확산시킨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미디어의 집중화와 문화적 획일화가 가속되는 시대에, 지역 고유의 목소리를 지켜내는 일은 경제 전략을 넘어 문화적 필수 과제가 되고 있다.
‘독창적이고 필수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예술가와 기관을 지원한다’는 푸린 재단의 비전은 결과적으로 선견지명이었음이 입증되었다. 8년 전 방콕에서 시작된 소규모 이니셔티브는 동남아시아 영화를 재편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참고하고 확장할 수 있는 문화 발전 모델을 제시했다.
동남아시아 영화의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밝다. 그리고 그 밝음은 개별 창작자의 재능만이 아니라, 잠재력을 인식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한 푸린 재단과 같은 기관들의 전략적 비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