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한-아세안 올레길: 걸으며 경험하는 문화외교
- 6월 15일
- 3분 분량
회의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특별한 형태의 문화외교가 있다. 걷던 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에 일어나는 문화외교다. 한-아세안 올레길은 바로 그런 경험을 위해 만들어졌다.

조금 특별한 ‘올레’
제주 방언으로 올레는 집 대문에서 큰길까지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을 뜻한다.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을 이어주는 친밀한 통로인 셈이다. 2007년부터 제주 올레길은 이 소박한 단어를 총 437km에 달하는 해안 및 내륙 도보길 네트워크로 확장시켰다. 전직 언론인 서명숙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한 이 길은, 걷는 이들이 제주의 화산 지형과 어촌 마을을 새롭게 경험하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제주 남부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19.6km 구간인 올레길 8코스는 2024년 11월, 한-아세안 대화관계 수립 35주년을 기념하여 한-아세안 올레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25년 11월에는 아세안 10개 회원국을 상징하는 기념 벤치가 설치되며 길의 의미가 더욱 풍성해졌다.
열 개의 벤치, 열 개의 문화
벤치들은 코스를 따라 국가명 알파벳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브루나이 다루살람,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이 벤치들은 초고성능 콘크리트(UHPC)로 제작되어 제주의 강한 해풍과 염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각 벤치 옆에는 올레길의 상징인 말 모양 표지물인 간세가 함께 설치되어 있다. 이 간세에는 QR코드가 부착되어 있어 방문객들은 각국의 문화 콘텐츠를 살펴볼 수 있으며, ‘올레 여권’ 스탬프를 모으거나 잠시 걸음을 멈추고 쉬어갈 수 있다.
벤치의 위치 선정 또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 벤치는 중문색달해변의 넓게 펼쳐진 해안선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미얀마 벤치는 오랜 역사를 지닌 해안 방어시설인 환해장성 옆에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는 방문객들이 제주의 풍경 속에서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읽도록 유도한다. 이는 설명 중심의 전시에서는 쉽게 얻기 어려운, 섬세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문화 간 만남을 만들어낸다. 2025년 준공식에서 김재신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레가 집과 길을 연결하듯, 이 길은 한국과 아세안을 연결합니다. 먼 이웃을 가까운 친구로 만들어 주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소프트 인프라’와 실제 관람객의 만남
한-아세안 올레길이 정책 수단으로서 주목받는 이유는 실제 이용자들과의 접점에 있다. 제주 올레길은 이미 상당수의 동남아시아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특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에서 온 ‘슬로우 트래블러(여러 관광지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대신, 한 지역에 오래 머물며 현지인의 일상과 문화를 깊이 있게 경험하는 여행 방식)’들이 장거리 코스를 완주하기 위해 제주를 찾고 있다. 안은주 제주올레 이사장은 이 프로젝트가 이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기존 문화 프로그램의 일반적인 접근 방식을 뒤집는다. 보통은 콘텐츠를 만든 뒤 관객을 찾지만, 이 프로젝트는 이미 존재하는 여행 경험 속에 문화적 요소를 자연스럽게 녹여 넣는다. 그 결과 문화적 만남은 우연하게, 신체적인 경험 속에서, 그리고 천천히 이루어진다. 이러한 경험은 디지털 캠페인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이해하기 쉽다.
확장되는 네트워크
이 올레길은 제주국제평화센터 내에 위치한 제주 아세안홀과도 연계된다. 이곳에는 아세안 각국 대사들이 직접 선정하고 서명한 도서를 비치한 아세안 문화·관광 북 코너(ASEAN Culture & Tourism Book Corner) 가 운영되고 있다.
올레길과 아세안 홀은 하나의 건물 안에 갇혀 있는 문화 공간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분산된 문화 캠퍼스’ 를 형성한다. 아세안의 최신 회원국인 동티모르 의 벤치 또한 향후 한-아세안센터 가입 절차가 완료되면 설치될 예정이다.
주목할 만한 모델
문화외교는 흔히 행사 규모로 평가된다. 콘서트의 관객 수나 방송의 도달 범위가 그 기준이 된다. 그러나 한-아세안 올레길은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바로 ‘만남의 지속성’ 이다. 결국 이것은 바닷가에 놓인 벤치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먼 이웃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보도자료를 통해서가 아니라, 걷기라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고요한 순간 속에서 말이다.
출처 및 참고 문헌
공식 올레길 지도: Jeju Olle Route 8 (Official Site) — 월평부터 대평까지의 정확한 길을 확인하고 싶다면 클릭
기관적 맥락: ASEAN-Korea Centre (AKC) — 2025년 11월 벤치 기념식 개최에 대한 공식 보도자료를 "뉴스" 탭에서 확인 가능




